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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Jan 27. 2022

짬뽕, 비가 올 때

울적할 때, 묵직한 탄수화물의 위로

[여름에 쓰인 글입니다]


오래전부터 예견된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의해서 아직 SF만화 같은 상황이 대한민국에 오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더 있다가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와 같은 상황이 올 거라는 경고 중 한 가지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열 돔' 현상이 우리나라에도 2주가 넘게 지속되었다는 것과 6월 중순에 잠시 우리나라를 찾아왔다가 지나가는 장마라는 녀석이 일본에서 다시 올라와서 한반도에 머물다고 있다는 것이다.


점심에 왔던 손님이 저녁에 다시 와서 매상을 올려주면 그거 반가운 일이지만 점심에 왔던 진상이 저녁에 와서 다시 진상을 부리는 것만큼 그날 따라 가게문을 일찍 닫고 싶어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 장마가 딱 그런 기분이다. 햇빛이 내리쬐든 비가 많이 오든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처럼 뭐든 적당한 것이 좋으니까.


먹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와서는 빗방울들이 하나둘씩 창문에 맺혀 중력의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차 한잔을 우려내려고 하거나 커피의 향기를 한잔 맡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유리창에 발자욱을 남기며 내려가는 물방울들과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 거기에다가 향긋한 그 무언가가 함께하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의 감상적인 부분의 하나인 것일까, 비 오는 날에는 커피가 특히 그립다.


나도 비 오는 날에 감성적인 마음과 감정을 갖게 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비가 적당히 오는 날에 빗소리를 들으며 그 분위기 자체를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노래가 '비 오는 날에 누군가가 생각이 난다'라는 식의 가사를 중얼거리는 것에 이제는 그리 마음을 함께 묻어가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그러한 그리움을 선물할만한 사람은 이제 내 옆에 앉아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에는 큰 미련을 갖지 않고 깔끔하게 잘라내는 나의 성격과 인간관계 지침이 이유겠다. 다만, 비 오는 날에 더욱더 생각이 나게 되는 음식은 있다 (누가 식객 아니랄까 봐)


비가 오는 날에 으레 생각을 하게 되는 음식을 떠올려보자, 적어도 한국 정서에서 말이다. 빗방울 사이로 그 냄새의 분자들이 헤엄치며 본체를 더 돋보이게 하는 그런 음식들, 빈대떡과 부침 종류. 지글지글, 자글자글 거리며 빗소리에 박자를 맞추며 익어가는 파전. 입안에서 바삭거리는 모둠튀김들과 물방울을 뚫고 내 코끝을 강하게 찌르는 매콤한 짬뽕.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비도 오고 그래서, 니 생각이 나서...'라고 노래하며 괜히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우울감과 그리움과 슬픔을 '억지로' 끌어내지는 말자. 만약 최근에 그리워할 일, 충분히 애도를 표해야 할 일,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한 과거의 사건 등이 있다면 충분히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뜨거운 컵의 향기를 맡으며 감상에 젖을 수는 있는 것이다. 힘들게 잊었던 첫사랑이나 짝사랑의 소식이 간접적 혹은 직접적으로 들렸다던가 뭐 그런 일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일도 없는데 굳이 '비 오는 날 궁상떠는 분위기'를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약 날씨를 많이 타는 성격이라서 평소에 별일이 없더라도 비가 많이 오게 되는 날에 아무 이유 없이 우울감과 외로움 등이 당신을 찾아오게 된다면 탄수화물을 먹어보자, 당신의 후각과 미각, 청각을 한꺼번에 만족시킬만한 그런 탄수화물 말이다. 고춧가루와 붉은 고추로 코와 혀를 톡 쏘면서 진득하고 깊은 육수, 탄력 있는 면발과 불맛 나는 건더기가 가득한 짬뽕은 비 오는 날 쓸데없이 슬퍼지는 마음을 구원할 것이다.


빨간 굴짬뽕
흰 굴짬뽕


'비도 오고 그래서 니 생각이 나'면 짬뽕을 시켜 보자. '비는 오고 슬픈 음악이 흐르고 네 생각이 나서 잠이 안 오면' 짬뽕을 시켜야 하는 때인 것이다. 야밤이라서 살찌는 것이 걱정된다면 먹잘알 백종원 대표의 말처럼 2시간 정도 있다가 자면 살은 찌지 않을 것이고 만약 살이 찌고 얼굴이 조금 붓는다고 하더라도 괜한 감정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과 머리가 피곤해지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개운하고 기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거나 다음 날을 준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짬뽕값과 배달료가 많이 올라서 최소 주문 가격을 생각해 군만두나 1인용 탕수육을 추가해서 적어도 이만원은 지불해야 하겠지만 단돈 이만원으로 앞으로 살아간 일주일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괜찮은 투자라고 생각한다.


시원한 맛을 원한다면 홍합과 굴 등 해물(짬뽕에 굴과 부추가 들어가면 맛은 이미 보장되었다)이 잔뜩 들어간 해물짬뽕, 진한 맛을 원한다면 돼지고기나 차돌박이로 맛을 낸 고기 짬뽕, 저렴하고 간단한 짬뽕이 먹고 싶다면 오징어 맛이 나는 즉석 짬뽕도 좋은 선택이다. 어떠한 짬뽕이 되었든 당신을 우울의 늪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물론 우울증이 있으시다면 신경정신과를 먼저 가셔야 합니다).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팩트: 정신 나간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속는 셈 치고 해 보시라, 가끔씩은 가벼운 말 몇 마디보다 무거운 칼로리가 사람에게 큰 울림을 줄 때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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