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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Jan 26. 2022

돼지국밥, 부산

결혼하는 친구에게, 조화로운 돼지국밥의 교훈

매년 두어 차례, 나와 나의 바깥양반은 머나먼 여정을 떠나야 하는데 그 이유는 나의 어머니를 포함한 친가 친척들이 대부분 부산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 덕분에 나와 함께 사는 이쁜 여자는 일 년에 두 번 부산이라는 도시에 함께 내려가서 부산의 볼거리와 먹거리들을 즐길 수 있는 특권 아닌 특권을 누릴 수밖에 되어버렸는데 그중에 우리가 부산에 가면 꼭 빼먹지 않고 먹고 오는 것이 있으니, 바로 '돼지국밥'이다.


그 기원은 개성과 황해도 일대에서 끓여먹던 돼지국밥이 한국전쟁 당시 이남,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에 의해서 영남 지방의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는데 부산이 원조인지 밀양이 원조인지는 그 의견이 분분하여 내가 차마 가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여하튼, 내가 부산에 내려가면 머무는 숙소 바로 앞 정도는 아니고 5분 정도 걸어내려가면 있는 24시 돼지국밥 식당에서 '돼지 둘이요!(뭔가 분하다...)'라고 외치며 들어서면 부산 아지매분들이 뚝배기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는 부엌에서 거의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부글거리는 뽀얀 돼지국밥이 모셔 나온다.


부산에서는 주로 돼지의 머리를 포함한 거의 모든 뼈들을 솥에 넣고 끓이는 방식으로 육수를 내는데, 가게마다 그 방식이 조금씩은 달라도 부산은 거의 다 그렇다. 서울의 순댓국이나 양평의 소머리 해장국 등과는 많이 다른 성격을 가진 부산과 밀양만의 돼지 맛. 그 진하고 구수하며 돼지 냄새가 폴폴 거리며 흩날리지라도 이 국물 맛에 길들여지면 매일 먹고 싶은 마성의 매력을 지닌 국밥이라고 나는 감히 평하고 싶다.


하얗고 뜨거운 국물 사이, 새우젓으로 틈틈이 간을 맞추고 부산 아재분들께서는 '풀때기' 혹은 정구지 (부추의 경상도 방언)에 고춧가루가 듬성듬성 묻은 것을 넘칠 때까지 밀어 넣고 그 뜨끈한 끓어오름이 다 가시기도 전에 재빨리 저민 마늘들을 두어 숟가락 푹푹 퍼서 넣고, 뚝배기 옆 작은 그릇에 고운 자태의 똬리를 틀고 앉은 소면도 말아 넣으면 그것이 바로 완벽한 돼지국밥인 것이다. 부추, 마늘, 소면이 없이는 부산 돼지 국밥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 국밥의 맛은 순댓국의 육수보다는 더 진하고 해장국보다는 심심하며 몸의 오장육부를 뜨겁게 덥히는 맛이라고 얘기하겠다. 대충 썰린 듯이 얇은 돼지고기 사이로 밥알과 부추, 마늘들이 함께 씹혀서 심심하고 매콤하고 알싸하고 짭짤한 조화를 만들어내고 국밥이라는 가성비까지 더해지니 부산의 돼지국밥은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훌륭한 음식이다.



강릉에서도 이 부산 돼지 국밥의 맛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식당이 몇 있는데, 내가 강릉에 와서 알게 된 친구 중 하나는 부산의 돼지국밥은 먹어본 적이 없지만 강릉의 돼지국밥집에서 돼지국밥을 알게 되었다. 국밥 집의 특성상 밤늦게까지라도 영업을 하는 곳이 많기에, 이 시대의 전형적인 직장인인 이 친구는 이따금씩 야근과 과한 업무에 쩔어 퇴근을 하는 날이면 집 근처의 돼지국밥을 들렸다 귀가하는 것이 취미라고 하였었다.


누구나 퇴근길에는 뜨끈하거나 시원하거나, 몸과 마음에 만족감을 동시에 주는 음식을 원하기 마련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돼지국밥을 즐겨먹는 편은 아니지만 국밥 육수에 치즈를 살짝 넣어서 부드러운 맛을 낸 치즈 돼지국밥이나 고추와 고추기름을 시뻘겋게 넣고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매운 돼지국밥을 주문하고는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한편씩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다가 집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는 그 친구로서는 국밥에 소주, 그리고 식후땡이 아니라 국밥에 치즈나 고추, 그리고 드라마가 잠시나마 낙원을 경험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렇게 서로 바쁜 삶을 살아가느라 연락이 뜸했던 친구였는데 최근에 결혼을 한다며 소식을 알려 마음이 기뻤다. 그리고 그 친구가 보내준 자신과 자신의 배우자의 사진을 보니 늦은 밤 돼지국밥 집에서 국밥을 후후 불며 드라마에 눈을 집중하고는 소중한 저녁식사를 하는 그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혼'이라고 하니 돼지국밥이 얼마나 조화로운 음식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결혼도 함께 사는 두 사람의 조화가 많이 요구되는 관계이고 생활이 아니겠는가. 동방에서 많이 먹는 쌀밥이 있으니 그에는 서방에서 많이 먹는 밀가루 음식인 소면이 말려들어감이 응당 마땅함이요, 한의학에서 차가운 성질의 음식으로 분류되는 돼지고기에 따뜻한 음식의 대표인 부추와 마늘로서 음과 양, 혹은 열과 냉의 균형을 잡아 속앓이를 예방하는 것은 마치 서로 한 집에서 결혼하기 전까지의 오랜 세월로 성향이나 성격이 굳어진 두 사람이 반대되거나 비슷할 수 있는 서로의 장단점들을 보완해주면서 사는 것과 같지 않은가, 게다가 돼지고기에 얹혀 단백질의 소화를 돕는 새우젓의 등장은 결혼 생활 중에 서로 쉽게 단단히 굳혀져 토라질 수 있는 상한 마음을 풀어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 돼지국밥에는 마늘, 소면은 없을지라도 꼭 빠지면 안 되는 필수품인 부추가 있는데 이 부추의 방언인 '정구지'는 사실 한자이다, 사투리가 아니다. 정구지(精久持)로 부부의 관계를 오래 유지시켜준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즉 천연 '정력증강제'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결혼생활과 부부관계에서 어떤 것을 의미할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것만 얘기해두겠다. 여하튼 돼지국밥에는 정구지가 필수불가결이다.


동양과 서양철학, 열과 냉, 부드러움과 단단함의 조화, 그리고 여기서는 언급할 수 없는 그 요소까지. 돼지국밥에는 사랑, 결혼이 담겨 있는 것이다. 뚝배기의 뜨거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땀을 뻘뻘 흘리고 드라마를 곁들여 즐길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음식이다. 나에 대해서 돼지국밥으로 별걸 다 얘기하는 장황스러운 정신 나간 인간이라고 얘기해도 좋다, 왠지 모르게 부산 사투리로 '앵간히 해라, 자슥아'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돼지국밥을 사랑하고 그 안의 재료들의 조화를 사랑하는 나는.


이제 곧 결혼하는 친구여, 돼지국밥과도 같은 결혼생활, 돼지국밥과도 같은 사랑, 뜨겁게 하며 살아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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