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일기] 모락모락(母樂母樂) 단팥죽, 강릉

즐거운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죽과 빙수

by 김고로

누군가에게서 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내 미식 기억의 저편에 포남동에 단팥을 참 잘하는 집이 있다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몇 주전에 남대천에 억새를 보러 가자고 하던 이쁜 여자의 꼬임에 끌려 포남동 근처를 가는 김에 나는 포남동 어느 아파트 단지 앞 골목에 있는 아주 작은 죽집에 가보자고 했다. 팥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호하는 편도 아닌 이쁜 여자가 같이 먹을 수 있는 호박죽이나 빙수도 있다는 것을 어느 어플로 확인하고는 괜찮겠다 싶어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남대천에서 걸어가기에는 살짝 피곤한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기에는 짧은 거리, 굳이 찾아보려고 하지 않으면 알 수도 없는 동네 골목 구석의 끝자리에 원목 벤치와 따뜻한 통유리 너머로 작은 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바 위에는 잎사귀 풍성한 화분들이 있어서 사장님께서 계신지 안 계신지 밖에서는 알 수가 없다, 일하시려고 일어나시지는 않는 한. '사람별도표'에서 유료광고를 하신 적도 없고, 특별히 홍보를 하신 적도 없다, '사람별도표'의 계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시간도 지난 추석이라는 과거에 잠시 정지되어있는 듯하다. 뭐랄까, 가게의 상호명이기도 하고, 이곳의 슬로건인 것 같기도 한 '모락모락'이라는 이름답다. 사장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분께서 '즐겁기'위해 하시는 작은 죽집.


이 죽집의 외관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죽집'의 외관과는 많이 다르게 '사람별'스럽고 '젊은이'스러운 감성을 은은하게 담고 있다. 어르신들이 들어가고 싶어하기 보다는 강릉을 찾아온 관광객이나 지나가던 젊은이가 한 번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싶은 그런 인테리어의 디자인.


나는 이쁜 여자와 단팥죽, 호박죽, 팥빙수를 주문했다. 메뉴들에 대해서 전체적인 얘기를 해보자면 그야말로 정성과 사장님의 미식적 감각이 느껴지는 맛이다, 메인과 사이드, 그리고 곁들이는 차의 맛과 온도까지 세심한 사장님의 배려와 감각이 충만하다. 차가운 음식에는 따뜻한 음료, 따뜻한 음식에는 미지근한 음료, 죽의 온도는 너무 뜨겁지 않게 뭉근하고 따뜻한 정도로.

모락모락 단팥죽의 간판메뉴, 단팥죽

가게 이름부터가 이미 '모락모락 단팥죽'인 것처럼 모락모락, 따뜻한 손길로 내어주시는 단팥과 단팥죽에서는 정성과 시간의 맛이 난다. 사장님의 수고가 천천히 재료에 깃들였는가 보다, 그녀의 혼이 담겨서 요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입안에서 기분 좋아지는 단맛이 입안 전체에 스며든다. 나는 '맛이 난다' 혹은 '느껴진다'라는 표현보다는 '스며든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팥의 단맛이 혀에 닿으면서 입안에 가득 찰 때, 그것이 혀의 한 부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입안에 퍼지는 그 느낌. 그리고 자연스럽게 눈이 감기고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행복하다'


단팥죽에 사이드로 함께 나온 견과류 가루와 마요네즈에 버무린 칵테일 후르츠가, 단팥의 단맛으로 인해 자칫 지루하고 물릴지도 모르는 우리의 입을 다시 상큼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곁에 나오는 쌉쌀하고 개운하며, 적절한 온도를 갖춘 혼합차의 맛은 식사의 마무리를 알리는 것. 특히나 요즘 입맛에 맞추어 단팥죽에는 호박죽이 살짝 끼얹어져서 단팥에 더욱 부드러움을 더한다.

모락모락 단팥죽의 계절메뉴, 팥빙수


단팥죽보다는 조금 더 달콤함이 가득 담겨 있는 팥빙수에서는 계피에 조린 사과 조각이 사각거리면서 씹을 때마다 사과의 향긋함과 절여진 설탕의 달콤함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어나온다. 더 진한 농도의 끈적거리는 단팥이 알알이 씹히고, 계피와 팥에 따뜻하게 버무린 찹쌀떡 조각이 사각거리는 빙수, 사과, 단팥 사이에서도 굳지 않고 쫄깃하니 식감이 제법이다. 다양한 달콤함들이 버무려진 시원함에 더위도 잠시 잊었다.



호박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호박죽의 식감과는 약간 다르다. 단호박의 맛이 단팥죽과 마찬가지로 입안에 스며들고, 부드러우며 은은한 단맛과 풍미를 갖고 있다. 단팥죽을 얘기할 때는 다루지 않았으나 각각의 죽에 알맞은 토핑(대추라던가, 견과류라던가)이 곁들여져 있어서 밋밋한 식감에 씹는 즐거움을 더한다.


전체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죽'이라는 것과는 많이 다른 죽을 제공하는 집이다. 커다랗고 쫄깃한 새알, 입안에 씹히는 찹쌀들이 가득 들어서 끈적거리며 고소하고 단팥과 호박의 살이 씹히는... 시장에서 팔거나, 어르신들께서 후손들을 위해서 만들어주시던 그 '옛날'에 먹던 단팥죽, 호박죽과는 많이 다른 맛과 식감을 가진 집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많이 인상 깊었던 것은 단일 메뉴, 사이드 메뉴 그리고 음료 간의 식감 그리고 맛의 균형을 거의 완벽하다시피 (이건 개인 취향이니까) 잡은 사장님의 미식 감각과 솜씨, 그리고 정성이 느껴지는 맛. 거기에 더해지는 손님을 위해 음식과 음료의 온도까지 맞추는 세세한 배려. 음식이 나오는 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집이지만 그 손맛의 정성이 담긴 음식을 받고 미소를 지으면 언제 그렇게 기다렸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적어도 나에게는 '하루를 행복하게 하는' 맛이다.


앞으로도 종종 이 죽집에 들리기 위해 '굳이' 포남동까지 갈 예정이다, 작은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그 죽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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