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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Feb 20. 2022

[픽션]극락식당

1-2

"으음... 먹고 싶은 음식이라, 무언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본 지 오래되었다 보니..."


"당신의 기억 속에, 그리운 맛이 있을 거예요, 분명."


곧 일을 시작하려는지 마스터가 자신의 긴 머리를 묶어 올리고, 양팔을 걷어붙였다. 희고 고운 피부와 목선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전생에 요리실력뿐 아니라 고운 미모로도 이름을 날렸던 마스터, 그녀였다.


"잘 먹은 귀신은, 때깔도 곱지. 분류 전 마지막 자유시간이다. 활용해보도록."


사자가 말을 맺자, 상걸은 언제 녹색 모자를 벗었는지 덥수룩한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여름날이었던 것 같은데, 집사람이 국수를 하나 해왔었던 기억이 있군요... 제가..."


상걸이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시에 그들이 앉아있던 식당의 벽과 주변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리고 소용돌이에 감긴 듯 휘리릭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하며 마스터와 사자가 본 적이 없는 배경과 장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들의 공간이 또 따른 시공간으로 변했다.


"시작되는군."


흙과 먼지 자국이 내려앉은 겉옷에 장화를 신고 앉아 바테이블에서 물을 마시던 상걸은 사라지고 그 장소에는 마스터와 사자만이 서있었다.


"여기는 또 어디려나요, 사자님."


"모른다."


그들이 서있던 공간의 하늘에서는 타는 햇살이 매섭게 내리쬐었고 논밭의 사이 이동하는 길 위에 그들은 그 복장 그대로 서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축축하고 뜨거운 공기가 그들의 뺨을 매만졌고 마스터는 이마의 흐르는 땀을 훔쳤다.


"제가 모르는 어느 시대의 시골인가 보군요. 옛날에도 이런 더위를 경험했었던 기억이 나요. 그곳에서 일을 하고 나면 온 몸이 땀으로 샤워를 했었는데 말이죠."


"유감이군."


사자는 입에서 익지 않은 한기를 뿜으며 품 안에서 검은 손수건을 꺼내 마스터에게 건넸다.


"쓰겠나?"


"감사하죠, 호호... 역시나 얼음장 같아서 좋네요, 이런 날에 딱이에요."


마스터는 사자가 건넨 검은 손수건은 목에 감으며 웃었다, 사자가 기본적으로 지닌 한기가 그녀의 목을 감싸며 소름 끼치는 청량감을 주었지만 더운 날씨라 그녀는 개의치 않았고, 이렇게 자주 사자의 물건을 빌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자의 물건이란, 그런 법이지."


그렇게 주변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논밭 한가운데, 이윽고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쪽에서 누군가가 머리 위로 커다란 면포가 덮인 양철판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흰색의 짧은 여름 셔츠에 헐렁하고 펑퍼짐한 고무줄 바지, 머리에는 흰 수건으로 덮은 젊어 보이는 아낙네. 한 손으로는 머리 위에 올린 양철 판을 잡고, 한 손에는 밝은 황색의 커다란 양은 주전자를 든 모습.


그리고 그녀가 걸어가고 있는 시선의 끝에는 넓은 논밭의 군데군데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 푸릇푸릇하게 자라나고 있는 벼들 사이로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 녹색 모자와 새마을 마크가 박힌 셔츠를 입은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건너편에서 일하던 길게 수염을 기른 높은 연배의 남자가 상체를 피며 외쳤다.


"잠깐 쉽시다! 새참이 올 때가 다 되었구먼."


"새참, 그거 조오치!"


"어이, 이씨! 그만하고 새참 먹지! 오늘 새참은 이씨네 차례였지?"


'이씨'라고 불린 젊은 날의 이상걸로 보이는 청년은 허리를 펴고 목에 모자 밑에 덮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두드렸다.


"네, 그렇지요. 오늘은 무슨 국수를 하겠다느니 뭐니 하면서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서... 허허..."


그들은 서로의 노동을 격려하며 오늘은 또 어떤 새참이 올지 기대를 품고 논밭 사이에 있는 넓은 오두막에 올라 털썩, 몸을 맡겼다. 엷은 그림자가 잠시나마 그들의 더위를 가려주었다. 날이 날인지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지는 않았지만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감지덕지.


"어이, 저기 상걸이네 마누라 오네. 시간을 잘 맞춰서 오는 구만, 허허."


"이장님 말씀하신 걸 들었나 봐."


"에?"


멀리서 뒤뚱거리며 머리 위의 이고 있는 새참과 양은 주전자와의 균형을 맞추며 걸어오는 '마누라'가 보이자 상걸은 급하게 일어나 반가운 손님을 맞이했다.


"에구, 많이 늦었죠? 더 빨리 오려고 했는데.."


"아냐 아냐, 다들 빨리 왔다고 칭찬이여. 오느라 수고했네, 명순이."


"저번에 열무로 담근 게 잘되어서 거기에 국수 좀 말아왔어요."


"그 사이에 막걸리도 챙겼어? 명순이 자네, 이번에는 잊지 않고 가져왔구먼."


"저번에 안 가져왔다고 그때 저녁 내도록 나 타박했잖아요."


명순이라고 불린 여인이 입술을 삐쭉이자 상걸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허허.. 그, 그랬나... 에이, 그래도 이번에는 가져왔으니 잘혔어."


상걸과 명순이 새참으로 준비된 국수와 막걸리를 가져오자, 오두막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정네들이 그들을 반겼다.


"오늘 새참은 뭐여? 맛난 것 좀 가져왔는가."


명순은 웃으며 답했다. 양철통에 담긴 열무김치 육수와 하나씩 감겨 나무 소쿠리에 한 덩어리씩 담긴 소면, 상걸은 막걸리를 잡고 함께 가져온 넓은 사발에 부으며 함께 일하는 이장과 동료들에게 건넸다.


"예, 열무김치에 국수 좀 말아왔어요. 막걸리도 같이 드셔요."


"상걸이가 말하기를 자기 마누라가 그렇게 김치를 잘 담근다고 그랬는데, 참말인가."


"일단 드셔 봐요, 한번 맛보면 환장해."


열무김치와 육수, 국수가 투박하게 담긴 그릇을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건네며 답을 가로챘다. 그들은 곧 열무국수가 시원하게 담긴 그릇에 얼굴을 박고 젓가락질로 맛을 표현했다.


씹을 때마다 아삭거리고 톡톡 터지는 듯한 열무 줄기의 식감, 새콤하고 매콤하며 시원한 열무김치 육수가 냉수마찰로 쫄깃하게 헹궈진 소면에 어울려 입안에 가득, 곧 새참을 먹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삭 거리는 열무김치의 소리만이 남았다.


"저도 먹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요, 남의 기억 속이라지만 정말 부럽네요."


상걸과 명순, 그리고 농사일을 하던 인부들이 앉은 오두막 곁. 상걸의 기억이 만들어낸 공간 속에서 열무국수를 새참으로 해치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마스터가 옆에 있던 사자에게 입을 열었다.


"그런가."


"이 더운 날에 열무국수 한 그릇, 최고잖아요."


"유감이군. 그런 것을 잊은지는 오래되어서."


"으휴, 재미없기는."


오두막에 올라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은 다들 짜기라도 했는지 비슷한 타이밍에 막걸리를 한잔 들이켜고 외쳤다. 달큼하고 부드러운 막걸리에 대한 찬사.


"크으, 끝내주는구먼."


"캬아, 시워-언하다."


"상걸이, 자네 집 열무김치는 뭘 넣었길래 이러나."


"저도 모르니, 집사람에게 물어봐요."


그리고는 다시 열무와 국수 가닥들이 담긴 사발 속으로 머리를 숙이고는 잠수. 그들을 바라보는 흐뭇한 미소의 아낙네와 평소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그녀의 남편. 더운 여름날, 시원한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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