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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Apr 17. 2022

[픽션]극락식당

2-1

이미 해는 늦게나마 긴 꼬리를 감추며 넘어가려고 하는, 아직 낮의 기운이 푸르스름하게 남아있는 봄날의 저녁. 도심 거리의 네온사인들과 입간판들은 바쁘게 번쩍거리며 자신의 창조자들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과 마주 보고 있는 가로수의 잎들은 뭐가 그리 여유로운지 살랑였다. 흰 정장과 다양한 블라우스들의 단정함과 편하게 차려입은 청바지와 셔츠들의 퇴근 물결을 가르며 오직 검은 면바지와 검은 셔츠, 철 지난 검은 코트와 챙 넓은 검은 모자로 전신을 물들인 남자.

입에는 달달한 과일냄새가 풍기는 막대사탕을 가볍게 물고 회색과 녹색, 적색의 보드블록을 따라서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각이 잡혀 정리 정돈된 회양목으로 울타리를 친 커다란 검은색 빌딩, 그 앞 매끈한 대리석에 깊고 어둡게 '양반그룹'이라고 파인 회사명을 새긴 바위를 잠시 쳐다보더니


"후우...'양반'이라..."라고 한숨을 내쉰 후


이전처럼 다시 천천히 걸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가로로 눌러앉은 챗바퀴와도 같은 은색의 회전문을 돌지도 않고 그대로 뚫고 걸어간 그는 번쩍이는 금색으로 '안내'라고 적힌 고풍스러운 고동색 나무 물결 양식의 안내 책상 뒤 하늘색과 군청색의 위아래를 갖춰 입은 경비원들과 안내원들을 아무런 제지도 없이 그대로 지나, 투명한 아크릴 판에 '사원증을 제시하세요'라고 붙인 검고 노란 스티커는 안중에도 없는 듯 스쳐 들어가서는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자동판매기의 캔커피처럼 나오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부딪힘과 방해도 없이 스르륵 들어갔다.


"9층의 영업부, 고객지원과라고 했었나."


그의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곧 붉게 숫자 '9'를 밝히며 상승하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하얀 손을 넣으니 그에 함께 딸려 나온 것은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는 기다란 두루마리, 두툼하고 거친 한지처럼 보이는 종이를 사자가 조금 열어 힐끗 보니 종이 위에 붉고 검은 글씨로 적힌 이름 '김지선' 석자.


엘리베이터의 반짝거리는 은색 벽 사이 붉은 버튼들 위로 작은 화면에는 양반 그룹의 로고들과 홍보 영상들이 반복되고 있었고 '하나의 가치, 하나의 가족'이나 '행복 경영, 고객 만족 실현' 등의 피고용자들이 보면 그저 말없이 웃기만 할 것 같은 회사의 경영방침들이 주변에 어울려 붙어있었다.


때- 앵-


사자가 엘리베이터의 무심한 배웅을 받으며 9층에 발을 딛자 저 멀리 사무실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으-아-아악!!"


꽈당 우당탕


사자는 그런 일들을 많이 겪는다는 듯 털끝 하나 떨지 않고 자연스럽게 모자를 벗어 먼지를 털어 쓰고 옷매무새를 잠시 가다듬더니


"시작부터 꽤 시끄럽군" 중얼거리고는


회색과 흰색의 벽, 푸른색의 대자보, 달력, 꿀렁거리는 정수기를 지나서 수십대의 컴퓨터와 헤드셋, 서류와 전산장비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하아.... 딱한 녀석이군."


안쪽의 조금 더 특별해 보이는, 사무실의 최고 책임자처럼 보이는 책상에 걸맞은 의자는 이미 사자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근처에 정장 바지와 블라우스를 입고, 의자가 이미 뒤로 넘어가서 보이지 않는 책상을 향해 울상을 지으며 머리를 끈으로 단정하게 묶어 올린 불투명한 여성과 같은 존재가 자신의 자리였던 곳에 앉아있었다.


사자가 가까이 다가가니 야근을 막 시작하려고 했던 것 같은 이마가 넓고 몸매가 표주박처럼 둥근 중년의 남성이 와이셔츠에 매달린 넥타이로 얼굴을 덮은 채로 이미 기절해 있었고, 직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불투명한 여성은 천천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힘들게 중얼거렸다.


"부-자앙-님.... 이거 어-떠억-해요-... 끄윽... 끅... 흑..."


그녀는, 그녀의 눈에서는 아무리 울고 흐느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그녀의 울먹거림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무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자는 그렇게 홀로 슬픔을 흘리려고 하는 그녀의 뒤에 다가가서 손을 들고는


딱콩


사자는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고는 뒷머리에 꿀밤을 날렸다, 고통은 느껴도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만.


"아야...."


"일을 할 필요 없다, 너는. 모르나?"


"네에....? 안 해도... 돼요...? 끅... 흑...."


뒤로 말끔하게 머리를 묶으려고 했지만 군데군데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이 삐져나온 그녀의 머리, 얇은 은색의 둥근 안경테를 쓴 그녀의 얼굴은 삶의 고단함에 찌들어 푸석해진 모습이었다.


"후우... 가면서 얘기하도록 하지. 일어나라."


사자는 불그스름한 빛이 돌기 시작한 안광으로 그녀를 살피며 그녀가 앉은 바퀴 의자를 뒤로 꺼내며 말했다.


"네에...? 가요? 어디를요....?"


"네가 지금부터 가야 할 곳."


"에에...? 그게 어디....인데요..? 그리고 고객 대응이... 아직 다, 안 끝났어요...."


"안 해도 된다, 그 일. 두 번 다시는."


"아.. 안돼요...! 이거 안 하면 클레임도 또 들어오고.... 대리님한테도... 부장님한테도 혼나고... 흑흑..."


"후우.... 천천히 설명해주지, 나와라."


"아... 안돼요... 이거 하고... 퇴근해야..."


"빨리 나와라, 나도 퇴근하고 싶다."


"아... 안돼요....! 부자-앙님-....!"


검은 사자는 희미하게만 보이는 양반그룹 영업부 고객지원과의 '전' 직원이었던 김지선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가볍게 들어 그녀를 끌고 나갔다. 이미 푸른빛의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공기 아래 걸어가는 차사와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걷는 그녀는 더욱더 어두운 복도로 사라졌다.


수시간 후, 넘어졌던 자리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부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앉아있었던 것과 같은 흔적이 남아있는 의자와 전원이 켜진 채 우웅거리는 컴퓨터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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