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안전기지
우리는 모두 역기능적인 핵심신념을 안고 살아간다고 한다. 이 신념은 우리가 아주 어렸을때부터 어떤 반복되는 상황으로 굳어진 상처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근데 왜 이게 역기능적이냐고 하면 우리의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신념대로 그 사건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거기서 퍼져나가는 자동적인 생각들로 상대를 평가하고 상황을 판단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야속하게도 나의 결핍과 상처를 더 후벼파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관계를 단절시키기도 한다.
심리상담을 받기 전에는 나의 핵심신념이 무엇인지 조차 몰랐지만 지금 2년 정도 꾸준히 상담을 받아 오면서나의 몇 가지 굵은 핵심신념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게 타당하다고 굳게 믿어왔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면 관계를 회피하거나 단절하는게 나의 주된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 내가 지금 이런 자동적 사고를 했고, 거기에 어떤 오류가 있고, 이것은 나의 어떤 핵신신념들 때문에 이렇게 내가 반응하는구나. 그래, 그럼 한번 그게 뭔지 찾아볼까?' 라는 여유가 생겼다.
(그렇다고 분노와 불안같은 강렬한 자극앞에 저렇게 반응된다는 말은 아니다.)
사건이 생기고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아 내가 이런 장면들에서 이렇게 반응을 하는구나.
이런 생각의 패턴들이 있구나.
한번 찾아가서 나를 알아차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걸 안다고 해서 내 핵심신념이 단번에 순기능적으로 바뀌진 않겠지만 적어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나의 부정적인 핵심신념을 건강하게 다뤄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의 아주 큰 핵심신념 하나만 소개하자면
바로 '결함'의 신념이다.
상담 받으면서 내가 자주하던 말이
'잘나야지만 가치가 있다. 저 사람이 내 진짜 모습을 알면 실망할꺼야. 내 진짜 모습을 알까봐 조마조마 해요. 난 결국 버림받고 외로워지겠지. 타인과 비교를 많이 해요. 저는 못나고 열등해요. 누가 절 칭찬하면 내꺼 아니라 너무 불편해요.' 등등등
그리고 상담에서 선생님과 함께 나의 신념을 발견했을때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 그래서 내가 저렇게 저런 말들을 많이 했구나.
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불편했었구나.
이렇게 '아하' 하며 나를 좀 더 이해하게 되는 순간들이 조각 조각 쌓여갔다.
아무튼 서론이 길었지만 그래서 나는 칭찬일기를 쓰기시작했다.
완벽주의 성향까지 있어서 뭐 이런거 가지고 칭찬을 하나? 이런게 칭찬거리라고?
100점도 아닌데 어떻게 뭘 하라는 거지?
이런 감정들이 나를 다그쳤지만 그래도 일단은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잘한것에만 포커스를 두고 쓰는게 아니라
나에 대한 발견, 같은 일을 해도 괜찮고, 나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준것에 대한 감사
여러가지 감탄으로 나의 칭찬일기를 조금씩 확장시켜 나갔다.
결함의 신념이 있는 사람에게는 작은것도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게 정말 효과가 좋은 것 같다. 나를 알아주고 나에게 공감해주고
'잘~했어! 고마워!! 최고야ㅜㅜ!! 멋져멋져~ 사랑해:) 대견해>_< 기특해 ^_^ '등등
마치 나라는 어린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생각하면서
오구오구 잘했어요. 사랑이 흘러넘치게. 그냥 있는 그대로 읽어주고 수용해주는것.
처음엔 무미건조함 + 감정은 싹 뺀 보고식 어투 + 잘한일에만 포커스가 맞춰진 칭찬일기를 썼다.
예를 들면,
'아침에 식물에게 물을 줬다. 잘했다."
'식후 계단을 이용해 걸어올라왔다.'
'먹고싶은 음식을 먹어 좋다'
...
나의 어린시절 나에게 말하듯이 작은것이나 매일하는 것들도 발견하여 칭찬하고 크게 감탄하며 격려하고 스스로에게 고맙다라고 말해주며 더 나아가 나의 존재에 대해서 감사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쓰다보니 일기는 점점 확장되어 갔다.
위의 문장을 지금은 아래와 같이 쓸 수 있다.
'아침에 그 바쁜데도 식물에게 물도 줬구나! 우아 대단하다!! 자연을 사랑하고 잘 보살피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최고!'
'식후에 산책도 하고 심지어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왔구나! 위장 활동이 활발해져서 소화도 잘될 것 같고 덕분에 바깥 바람도 쐬고 상쾌한 공기로 기분전환도 시켜줘서 고마워.'
'먹고 싶었던 음식을 리스트에 적어두고 딱 먹고 싶을때 스스로에게 선물해주는 모습 진짜 장하다! 어쩜 그렇게 스스로의 감정과 욕구를 잘 알아주니~ 그런 모습을 보니 든든하고 안심이 돼. 많이~먹어^^ 고생했어 잘했어!!'
이렇게 하루에 나를 발견할때마다 틈나는대로 써주면서 남과 나를 비교하며 구덩이로 빠지는 횟수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이렇게 하루 하루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느끼게 되고, 그런 나를 내가 알아주고 칭찬하고 격려하다 보면 나 스스로와 연대감이 생기며 끈끈해짐을 느낀다.
그래, 내가 이런 부분이 약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나인걸. 고치려고 해도 잘 안되지만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내가 너무 대단하고 안쓰럽고 응원해주고 싶고 사랑으로 꼬옥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된다.
이렇게 나는 나와 조금씩 친해지며 나의 취향을 하나씩 수집하며 내 삶의 곳곳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사람이든 사물이든)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나와 있는게 편하고 너무 좋고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밖에서 찌그러져와도 나는 나의 안전기지로 돌아와 스스로 '오구오구~ 그랬어어~!! 아이구 힘들었겠다. 우오아와! 잘했어!!아아..그랬구낭 그럴수 있지 괜찮아!!'
이렇게 자기공감으로 나를 토닥토닥해줄 수 있는 힘도생겨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바라던 것인지 모르겠다.
나를 미워하고 비하했던 지난날을 가끔 떠올리면 갑자기 울컥하기도 한다. 지금도 가끔 그곳으로 가기도 하지만 구박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다시 나의 안전기지로 데리고 온다. 이렇게 조금씩 나는 나와 친해지고 있는 과정을 겪고 있다. 이 느낌 참 경이롭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