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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영 Nov 04. 2020

다시 너의 눈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1)

왠지 아플 것 같아 그만둔 회사

늘도 두 아이들을 재우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본다. 오늘 하루도 끝이 났다. 아니, 이제 못다 한 '나'의 하루를 추스를 시간이다. 잠든 아이들 이마를 가만히 쓸어 올리며 새삼 내 옆에 이 아이들이 있음에 행복감에 젖어본다. 조심스레 이불을 덮어준다. 곤히 잠든 천사 같은 얼굴들을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이제 그만, 글을 써야 할 시간이다. 나는 조용히 방을 나와 노트를 펼쳤다.


2014년 1월부터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나의 전 직장 다이어리다. 모두가 탐내던 생방송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다. 서울에서 여기저기 기웃댄 것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나에게 국장님을 비롯한 많은 스텝분들이 나를 지지해 주었다. 일이 잘 됐다. 작가실의 선배들은 모두가 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못하는 프로그램이라며 조언을, 때론 겁을 주기도 했다. 별로 마음 쓰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나는 용감했다.


당시 28살이었던 2013년에 결혼을 한 나는 대타 작가도 세우지 않고 오롯이 내가 쓴 원고로만 방송하며 일주일간의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신혼여행 중에도 인터넷 라디오로 방송을 모니터하고 방송 참여 문자를 확인했다. 그 정도로 일이 좋고 글 쓰는 게 좋았는데, 너무 무리했나 보다. 나는 착각했던 것 같다.  대학교 3학년 때의 내 모습처럼, 아직도 난 2박 3일을 밤새 영상 편집하고도 거뜬한 체력일 것이라고.


임신과 출산은 내 삶에 거역할 수 없는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임신을 하고도 히말라야 등반을 꿈꾸며 국장님과 다큐멘터리 기획에 참여했지만, 임신 9주 차에 절박유산 진단을 받고 약을 먹으며 안정해야 했던 것이다. 안정기가 된 것도 잠시, 이번엔 하혈을 했다. 글감이 아까워 이번에도 내가 원고를 썼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내가 불러주는 대로 남편이 대신 원고를 작성해주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갑작스레 이상할 만큼 강한 확신이 생겼다. 가까운 시일 내에, 내가 한 번 더 병원신세를 지게 될 것만 같았다. 출산예정일은 5월 중순이었다.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예측할 수 있었다는 건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했다. 어쨌든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퇴사 사유가 누군가에게는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재밌는 일이 다시 나에게 올까? 아직 써보지 않은 글감들이 다이어리에 빼곡했다. 아쉬움이 남더라도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뱃속의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잡초 같은 이작가'의 퇴사 사유는 "왠지 아플 것 같아서요"였다. 정말 그만두겠느냐고, PD님이 재차 물으셨다. 새로운 작가를 찾아 들여야 하지만 번거로우셔도 어쩔 수가 없었다. 부장님은 집에서 걸어 나오면 방송국까지 금방이니 매주 금요일마다 점심 먹으러 나오라고 재차 약속을 받아내셨다. 인수인계가 못 미더우셨나 보다.


그렇게 나는 2주 뒤에 퇴사를 했다. 그때가 2014년 1월이었다. 퇴사를 하고도 금요일의 점심 약속은 지켰다. 그것도 2주 동안이었다. 나는 퇴사 사유를 밝힌 후 정확히 한 달 뒤에 검진을 갔다가 입원했다. 조기진통으로 임신 36주 차가 될 때까지 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해야 했던 것이다.


뱃속에 있던 아이의 태명은 '햇님이' 였다. 출산에 임박해서는, 태명만 달랑 지어놓고 일이 곧 태교라며 아이에게 신경 써주지 못했던 나 자신이 조금 후회스러웠다. 한편 과감하게 일을 그만둔 건 잘한 일 같았다. 임신 초기부터 자동차 접촉사고, 전치태반, 절박유산, 하혈, 조기진통 등 나와 우리 아이를 괴롭힌 갖가지 일들이 떠올랐다. 우여곡절 많았던 열 달 동안  엄마의 뱃속에서 씩씩하게 잘 버텨준 햇님이에게 한없이 고맙고 대견했다. 건강한 아기. 이런 게 진정한 축복이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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