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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응지음이지영 Nov 05. 2020

다시 너의 눈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2)

다시 봐도 기가 막힌 나

너는 과연 어떤 아이일까. 임신 극초기부터 40주 동안 자동차 접촉사고, 전치태반, 절박유산, 하혈, 조기진통 등을 함께 겪으며 엄마의 뱃속에서 갖은 고생을 했을 우리 아기. 씩씩하게 너의 자리를 지켜준 대견한 아기. 네가 궁금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막연하게 자리한 모성애가 그제야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 같다.


지겨운 입퇴원을 반복하다 36주 차에 들어서자 담당 의사는 퇴원을 허락했다. 드디어 내일이 출산 전에 하는 '진짜'마지막 퇴원이었다. 겨우내 병상에서 침대, 화장실, 태동 검사실 외에는 병원 로비 조차도 가 볼 수 없었던 날들이 끝나는 것이었다. 바깥의 봄 공기가 간절한 날이면 시어머니께서 출근길에 찍어 보내주신 벚꽃나무 사진을 보며 달랬었다. 남들 다 하는 만삭 사진 촬영도 태교 여행도 물 건너갔지만 아쉽지 않았다. 그저 내일 퇴원하고 집에 가는 길에 집 앞에 핀 봄 꽃이라도 보겠구나, 하는 생각에 설렘과 못다 한 그리움이 벅차올랐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지구 상에 단 하나뿐인 어느 집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단 하나뿐인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세상의 중심인 듯한 그곳에 펼쳐진 광경은 끝없는 푸른 잔디뿐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푹신한 초록색 소파에 앉았다. 내 앞에 밀짚모자를 쓴 금발의 아저씨가 나타났다. 옆을 보더니 소개하듯 누군가를 불러냈다.


검은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났다. 덩치 큰 호랑이가 아기호랑이를 데리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온 것이다. 검은 아기호랑이가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보자 장난스럽게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아기호랑이를 안고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꿈속에서 무궁한 행복감을 느끼며 깨어났다. 이게 태몽이구나 싶었다. 너무 기뻤다. 시댁과 친정, 두 어머니들께 알렸다. 이렇게 행복한 태몽을 내가 꾼 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출산 후 첫 면회. 허리와 꼬리뼈 부근이 너무도 아파 잘 걷지 못했다. 산후조리에 대해 잘 모를 때라 몸을 사리지 못했다. 이 정도는 이겨 내야지.  난 이제 '엄마'니까. 면회시간이 끝나기 전에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에 신생아실까지 휠체어를 타고 갔지만 창문 턱이 높아 아기가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 하지? 급기야 휠체어에 무릎을 꿇고 서서 창문 턱에 매달려 아기를 봤다. 친정어머니나 둘째, 셋째 산모들이 봤다면 무슨 짓이냐며 말렸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도, 그때의 내 행동을 돌아보니 기가 막힌다.

 

아기의 이름이 정해지기 전까지 수유실에 가서 아기를 안고 '햇님이'를 반복해 불러 주었다. 산후조리원에 가서도 수유를 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아기에게 들려주었다. 함께 있던 다른 산모들, '조리원 동기'언니들도 아기에게 잘하는 엄마라며 부러움 섞인 칭찬을 해주었다. 나 자신도 놀랐다. 임신 중 마음먹고 태교를 할 적에도 뱃속의 아기에게 동화책 한 권 소리 내어 읽어주지 못했던 나였기 때문이다.


아기에게서 새로운 표정, 배냇짓이 나올 때마다 사진을 찍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것마저도 놀랄 일이었다. 블로그를 운영해보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내키지 않았던 나였고 그 이유인즉 맛집에서도, 여행지에서도 그저 음식은 맛나게 먹고 절경은 눈에만 담지 카메라를 드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나였기 때문이다. 첫 아이를 낳고 나니, 나는 전에 없던 수다쟁이, 전에 없던 '찍사'가 되어있었다. 출산 전에 그렇게도 좋아하던 일 생각은 까맣게 잊고 지냈다.


산후 조리원에 근무하는 전직 물리치료사 선생님은 꼬리뼈 부근, 허리, 골반 그 주변 통증은 내가 몇 년 전 보호구 없이 스노보드를 타다 다친 이유에서 라고 했다. 그때 엉덩방아를 찧은 게 지금 와서 또 아프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달리 그것 말고는 이 통증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 뒤로도 햇님이를 키우며, 이 병원 저 병원 찾아 헤메며 그렇게 3년을 아팠던 듯하다.


햇님이는 태어나자마자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시댁에서도, 친정에서도 첫 손주였던 것이다. 직장이 가까웠던 동생은 자주 집에 들러 조카도 보고 점심도 먹으며 혼자 하는 육아의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직장 동료와 친구들도 들러 출산을 축하해주었다. 부모님도 가까이 계셨다. 하지만 첫 손주의 재롱을 많이 보지는 못하셨다. 그래서 더욱 아이 사진을 열심히 찍었던 걸까.


햇님이 출산 2주 전, 동생은 결혼을 했고 그 결혼식을 치른 날 나의 부모님은 애초에 계획된 몽골 여행을 떠나신다며 서둘러 자리를 비우셨다. 임신을 하고서야 아빠에게 전에 없던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던 나.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바뀐 나의 모습 가운데 그게 가장 후회가 됐다. 좀 더 일찍이 애교를 부릴걸, 좀 더 자주 아빠와 저녁을 먹을 걸.


나는 출산 후 일주일이 지나고 아빠가 암에 걸리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아이를 낳는 동안, 동생이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부모님은 아산병원에서 정신없이 입원과 수술절차를 밟으셨던 것이다. 두 분이서 얼마나 놀라고 두려우셨을까. 그 모든 걸 해결하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다행히도 동생이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틈틈이 텅 빈 친정집을 돌보는 일을 했고 엄마의 가게도 혼자서 처분했다는 걸 알게 됐다. 아이 낳고 혼자 육아하느라 바쁜 것은 투정에 불과했다. 오히려 아이에만 매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미안하고 원망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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