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요란한 소리가 없는 날, 토요일이다. 물론 이런 날은 엄마보다 내가 먼저 일어난다. 날이 더워서 방문을 열고 잤으니, 뒤꿈치만 들고 내 방을 나서면 된다. 엄마는 밤마다 내 휴대폰을 가져가서 거실에 있는 장식장 서랍에 넣어둔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고 서랍을 여는 방법을 알게 됐다.
2층에 사는 아저씨는 매일 아침, 산책을 나서는데 창문이 열린지도 모르고 문을 닫다가 쿵! 소리 내기가 일쑤다. 엄마는 윗집 문 닫히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마에 주름을 새기며 “아휴, 저 놈의 영감탱이!”라고 구시렁대곤 한다. 막상 2층 아저씨를 길가에서도 만날 때면 두 손을 모아 “잘 지내셨어요?”라고 인사를 할 때면 엄마의 꿈은 배우가 아니었을까.
아저씨의 아침 산책이 습관이 될 때쯤, 엄마는 쿵 소리에 무뎌지게 됐다. 그리고 난, 쿵 소리에 맞춰 서랍을 열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지, 좋았어.
“아들? 뭐 해? 일찍 일어났네. 아빠랑 상인숲 갈래?”
“... 으잉? 영빈이 일어났어? 이 자식이 왜 벌써 일어났어. 발소리도 안 들리더구먼, 무슨 짓 하려고? 엉!”
엄마는 침대에서 아빠 목소리만 듣고도 내가 한 짓을 꿰뚫고 있었다. 아빠는 열 살인 나보다 눈치가 없다. 오랜만에 ‘레인보우 프렌즈’ 게임을 하려고 했는데, 틀렸다. 이왕 엄마에게 들켰으니 아빠랑 숲에 가는 게 훨씬 낫지. 나는 얼른 양말을 신고, 아빠 손을 끌었다.
“우리 아들이 웬일이야? 아빠가 숲 가는 길에 코코아차도 뽑아줄게. 잠깐 기다려봐. 동전도 챙겨가자.”
“아빠, 빨리 가자고!”
“야, 박! 영! 빈! 너 이리로 와봐! 게임은 일요일만 하기로 했어, 안 했어?”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서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우리 집 창문이 열린지도 모르고 현관문을 놓았더니 자석처럼 척 엉기며 닫혀버린다. 문이 내는 쿵 소리에 웃음이 났다. ‘엄마, 메롱!’
숲은 고요한 듯 고요하지 않았다. 사람이 내는 소리가 없어서 고요한 듯한데, 새소리는 고요하지 않았다. 숲과 새소리는 우리 집과 엄마 같았다. 새소리가 없는 숲은 진짜가 아닌 가짜일 거야.
“아빠, 요즘 엄마가 시장에 잘 안 가. 먹을 게 없어. 엄마가 만든 돈가스 먹고 싶은데, 거기에 [마이산 묵은 김치]랑 먹으면 딱인데. 이따가 해달라고 말해볼까?”
엄마는 김치를 담그는 대신 마트에서 파는 김치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뽑는 심사위원 같았다. 그중 진안에서 나오는 [마이산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그걸 찾아낸 것만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엄마다.
유성이네 집은 작년 겨울에 할머니 집에서 김치를 몽땅 가져왔지만, 나는 할머니가 없다. 유성이는 할머니가 두 명이나 있는데, 나는 한 명도 없다. 어리광쟁이 유성이 집에 놀러 오신 외할머니를 보면 [할머니들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김치를 몽땅 담그는 게 취미]인 모양이다. 유성이 엄마는 유성이 외할머니가 가고 나면 우리 집에 김치를 고루 갖다 주시는 데, 그게 마트에서는 얼마에 팔리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아들, 돈가스가 먹고 싶구나. 묵은지 좋아하는 건 딱 엄마 입맛이네. 오후에 엄마랑 시장 가자. 근처 마트도 가고. 알았지? 아빠랑 산책해 준 선물이야!”
“오예! 아빠, 이 상인숲 되게 좋아. 새소리도 듣기 좋고, 저녁 먹고 엄마랑 또 오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빠는 자판기에서 아이스 코코아차 두 잔을 뽑았다. 자판기는 동전 여러 개를 삼킨 뒤에야 잠에서 깨어난다. 정신을 차린 듯, 동전을 삼키자마자 메뉴판에 초록색 불이 들어왔다.
자판기 옆 벤치에 앉아서 시원한 코코아차를 마시니 [열 살의 여름날]로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 키운 숲은 느슨한 하품을 하고, 그 하품은 새에게도 전염이 되어 종일 새 하품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 그리고 자판기는 동전을 먹고 코코아차 하품을? 히히히. 나는 웃음이 났다. 상상하는 건 정말 재밌다.
“아들, 뭐가 그리 재밌어? 곧 비가 올 거 같아. 얼른 코코아차 마시고 집에 가자.”
“응, 아빠!”
쉰 살이 넘은 아빠는 대단하다. 코코아차를 얼른 마시지 않았다면 내 코코아차는 싱거워질 뻔했다. 집에 도착하자, 비는 쏟아지기 시작했다. 근육질 유성이 아빠는 이런 능력은 없을 걸?
“왔어? 다들 어서 씻어. 청소하고 제습기 돌리는 중이야. 아휴 너무 습하다 습해.”
제습기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급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물방울이 제습기로 빨려가는 상상을 한다. 이불에, 리모컨에, 창문에 엉겨 붙은 물방울 유령은 버티지 못하고 제습기로 빨려가고 있다. 나는 제습기 창의 습도율을 보고 놀란다. 65%, 물방울 유령이 이렇게 많다고? 내 상상이 더 커지려 할 때, 영화감독이 외치는 ‘커트’처럼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밥 먹으라니까? 이 시끼는 꼭 두 번은 말해야 한다니까. 제습기 앞에서 왜 넋이 빠진 거여? 얼른 와.”
그러면서 엄마는 내 다육이 동생을 들여놓느라 밥도 먹지 않으면서, 치.
아빠 덕분에 저녁은 [마이산 묵은지]와 함께 돈가스를 먹었다. 비가 그친 저녁이다. 제습기 물통이 꽉 찼다. 엄마는 물통을 비우고 다시 틀었다.
“영빈아, 상인숲 가고 싶다며? 가자. 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엄마, 동전도 챙겨 가면 안 돼? 숲 하품을 느끼려면 동전이 필요해.”
“얘가 뭐라는 거야? 코코아차가 먹고 싶다는 말을 뭐 이렇게 어렵게 해!”
“우리 아들이 게임 대신 일기를 쓰니까 멋진 말을 많이 한다니까. 아빠는 아들의 영원한 팬이야. 멋지다, 숲의 하품. 하하하.”
숲 입구에 있는 작은 무대에서는 매주 공연이 있었다. 할아버지들이 색소폰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스피커가 제법 커서 숲 전체에 할아버지들 노래가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 노래가 노을 지는 하늘과 어울렸다.
“영빈아, 저 노래를 이 시간에 들으니 외할아버지가 생각 나.”
“나도 장인어른이 생각 나. 무더운 날이면 술 한 잔 하시고, 집에 오시면 꼭 전축을 틀어놓고 노래 부르다 주무시곤 했는데.”
“엄마는 그게 너무 싫었어. 아주 지겨웠지. 여름만 되면 왜 술 마시고 우는지. 동네 돌아다니며 파는 약 장사한테 산 전축 소리도 싫었어. 근데 지금 들으니, 그때가 떠올라서 좀 그렇다.”
엄마는 제습기 같았다. 눈물 유령이 전축에, 색소폰에, 여름 저녁에 달라붙은 채, 다 빨아들이는 엄마는 제습기가 되어 코가 빨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