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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산책가 Jan 01. 2024

4. 함정 편


정수리가 타들어갈 듯한 여름날이다.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으로 달리던 친구들은 다른 아지트로 향하고 있다. 학교 건물은 기역자 모양이다. 기역자가 만든 그늘 땅덩이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가는 경쟁자 중에서 여자 아이들은 없다. 에어컨 바람이 가득한 도서관이나 교실 안에는 여자 아이들과 기역자 속 그늘을 차지하지 못한 남자아이들이 있다.


“영빈아, 오늘도 축구할래?”

“아니, 사람이 너무 부족해. 우리 땅 파서 함정 만들까?”

“우아, 재밌겠다! 내가 나뭇가지 주워올게.”


영빈이와 유성이는 함정에 빠질 누군가를 상상하며 흙을 파기 시작했다.


2교시는 국어시간이었다. 교과서 진도는 이미 모두 마쳤으니, 선생님은 저번에 제출한 동시 중에서 한 편을 골라 읽어주신다고 했다. 영빈이는 아차 싶었다. 올림픽 공원에서 박치기했던 그 여자애를 떠올리며 시를 썼는데, 누군가 알아차리면 놀릴 게 뻔했다. 친구들보다 자신의 글 쓰는 수준이 훨씬 높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애들이 내 글을 이해나 하겠어? 내 시가 뽑히는 건 너무 당연한데, 어쩔 수 없지 뭐.’


담임 선생님은 드디어 시를 읽기 시작했다. 영빈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미소를 띠었다.

‘좀, 부끄러운데?’

하지만 더 부끄러운 일은 영빈이의 예상이 보기 좋게 어긋났다는 거다. 선생님이 시를 읽자 점점 유성이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유성이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걸 엄청 싫어하는 친구다. 그렇다, 영빈이와 유성이가 만들고 있는 함정은 담임 선생님을 위한 작품이다. 속마음은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둘의 텔레파시는 강하게 통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점심을 먹고 나서 학교를 한 바퀴 돌곤 한다.




“영빈아, 함정 안에다 물도 채울까?”

“너는 매번 물어보고 그러냐? 너 하고 싶은 데로 해!”

물을 채우고, 나뭇가지를 얹고, 나뭇잎을 얹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흙을 덮으니, 그럴싸하다. 둘은 얼굴을 마주하고서 씩 웃었다. 손을 털고, 엉덩이에 묻은 흙까지 털어냈다. 그리고 학교로 뛰어 들어가서 창밖 너머를 지켜봤다. 빼꼼 내다보는 모습까지 둘은 똑같아서, 복도를 지나던 다른 아이들도 그들이 바라보는 곳을 같이 쳐다보게 됐다. 어쩌다 보니 아이들은 우르르 창가로 달라붙어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도대체 밖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몰라, 나도. 애들이 보길래 나도 보는 거야.”

“어? 저기 최운성 선생님이 오고 있어. 어? 우하하하하!”

빼꼼 내다보던 함정 설계자인 두 아이는 슬며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제대로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함정에 신발은 푹 젖었을 뿐만 아니라, 발까지 삐끗했다. 영빈이와 유성이는 도망가면서도 선생님이 미웠다. 적당히 우스꽝스러운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왜 다치기까지 하냐고요.


엊저녁에 먹었던 영빈이 엄마의 실패작, 닭볶음탕이 떠올랐다.

“설탕이 엉겨 붙어서는 덩어리째 요리에 들어갔지 뭐야! 뭐든 적당히 조절할 수 있도록 작은 부지런함이 필요한데 말이지. 영빈이 너도 화가 나면 그때그때 풀도록 해. 안 그러면 너답지 않은 단맛, 짠맛이 될 수 있다고.”

엄마의 변명은 가끔 명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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