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이야기 2
열-음[여름], 여름을 또박또박 소리 내어 보다가 떠오른 열음, 열 가지 소리. 그걸로 글을 썼다.
1. 소나기 소리, 싸리비 소리, 할머니 잔소리
비가 내린다. 싸리비로 시멘트 바닥을 쓸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소나기가 내렸나 보다. 세찬 비는 비질을 하는 소리와 닮았다. 싸리비는 억세서 시멘트 틈으로 자란 풀도 쓸려나간다. 아침잠에 빠진 어린 나는 거센 비질 소리를 먼저 들었다. 굳은살이 배긴 할머니 손쯤은 되어야지, 나는 감히 싸리비를 쥘 수도 없다. 할머니는 마당을 쓸고 있었다. 쓰악쓰악, 마당이 깨끗해질 때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야야, 아직도 자냐? 어서 안 인나? 학교 안 가냐?”
동향인 우리 집에는 아침 해가 가득 기울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밝음을 거부하는 나에게 할머니는 다가와 이불을 힘 있게 들어 올린다.
“알았다고!”
엄마는 어려워하는 할머니가 내겐 만만하다. 늦게 일어난 주제에 도리어 소리만 버럭 지른다. 엄마는 내 도시락을 챙겨두고 벌써 일하러 갔다. 할머니는 손주들 앞에선 꼼짝 못 한다.
“이것들은 깨워줘도 난리여. 그려, 네 팔자 네가 알아서 해라잉.”
자포자기한 듯한 할머니의 연극이 있을 때쯤, 비로소 말을 듣는 게 나다. 겨우 준비를 마치고 TV 앞으로 나간다. 이제 할머니는 마실 나갔다. 그래, 딱 5분만 보는 거야. 어제도 5분만 봐야지, 했다. 그러다가 학교를 향해 전력질주했었지. 어제와 다른 날이 될 줄 알았다. 오늘도 전력질주한다.
2. 매미소리, 냇가 물소리, 달음박질 소리
도시락 반찬엔 분명 김치가 있을 텐데, 도시락 가방을 흔들며 달린다. 지각이 싫지만 느긋함을 못 버리는 중학생이라니. 달리는 내게 더 빨리 달리라고 소리를 지르는 녀석이 있다. 7년 동안 땅 속에서 살다가 이제야 태어난 주제에 목청도 크다. 간밤에 비는 꽤 내렸다. 다리 밑을 언뜻 바라보니 이삼일은 있어야 놀기에 적당하겠다. 작은 개울은 물이 불어서 상아색이 되었다. 아, 늦지 않았다면 잠시 발을 담고 싶었다. 굵은 파마로 부드러운 웨이브를 가진 머리처럼 개울은 활달한 기운이 돌았다. 중학생이지만 아직도 물놀이가 지겹지가 않다. 지각생이 되지 않기 위해 달리는 동안 개울물 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버스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내린다. 다행히 러너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같이 달릴 사람이 있다는 것, 소심한 내가 튀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얌전하고 말수도 적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게 주 1회 정도만 빼놓고 거의 지각을 한다. 늦어진 시간도 불과 3분, 조금 일찍 일어나던지 TV를 보지 않으면 되지만 졸업식을 하기 전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나와 달리는 사람들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매미가 울어대는 아침에 나와 동행하는 러너들의 발소리가 지금도 선명하다. 오르막 진입로를 향해서 숨이 차오르도록 뛰었다. 교문 앞에는 체육선생님인 김상동 선생님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꼭 가까이에 사는 놈들이 지각을 한다니깐! 빨리 안 뛰어!”
역시 체육 선생님 목소리는 매일 들어도 무섭다. 다음날도 또 듣겠지만.
3. 과학선생님 목소리, 땡땡 쉬는 시간 소리, 수돗물 소리, 창밖으로 퍼져가는 아이들 소리
과학 시간은 언제나 졸린다. 하필 화학반응식을 배우는 날이다. 원소 기호는 다 외웠지만, 화학반응식을 듣는 동안 꿈속과 현실을 오갔다. 더운 여름날에 배우는 화학반응식 수업은 결국 이상한 노트 필기를 하고 말았다. 아주 엉뚱한, 글씨는 줄을 따라 쓰지 못하고 위로 올라가는 삐뚤어진 글씨였는데, 화학반응 기호는 없고 꿈속에서 만난 단어를 쓰고 말았다. 과학은 모르는 세계라 그게 또 맞는 거라 믿었다. 더운 날, 과학 선생님 목소리는 그토록 치명적이다. 잠늪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소리는 오로지 ‘땡땡땡, 쉬는 시간’ 소리뿐이다. 내 필기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뛰쳐나간다. 수업 시간에만 얌전한 나였다. 쉬는 시간에는 무조건 뛰쳐나가야지. 저 멀리 ‘통일동산’이라고 부르는 큰 느티나무 근처에서 남학생들이 놀고 있다. 세상에, 다람쥐를 잡고 있는 중이다. 개구리는 잡아먹는다고 치자. 다람쥐는 뭐에 쓰게? 다람쥐는 왜 잡히는 거지? 남학생들은 손을 동그랗게 모아서 수돗물을 먹는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도 차가운 물을 부어댄다. 진득한 땀 냄새나는 그들이 교실로 들어온다. 저희들끼리 무용담을 나누며 목소리가 커진다. 혀를 차며 남학생들을 바라보는 여학생들은 언제나 누나 같다. 난 잘 모르지만 덩달아 혀를 끌끌 댄다.
40여 명의 여름날 쉬는 시간은 한껏 열어둔 창밖으로 퍼져 나간다. 열다섯 살들은 여름날의 태양에도 대수롭지 않은지 재잘거렸다. 여학생은 언제나 누나처럼 혀를 끌끌 댔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