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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Nov 02. 2021

아홉 살 아이 혼자 병원에 갔다




지난주 가족들과 경주여행을 다녀왔다. 일교차가 심한 날씨라 옷도 여러 개 챙기고 매 시간마다 조끼를 입다가 패딩을 입다가 하며 지냈다. 경주의 가을은 아름다웠고 평소와 달리 걸을 길이 많았다. 그리고 호텔의 공기는 건조했다. 기관지가 약한 아이가 아프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여행이 끝날 즈음 진해진 콧물은 주말 내내 아이를 괴롭혔다. 아이는 일기를 시로 쓰겠다고 하더니 코에게 부탁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야속한 코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이런 증상을 갖고 학교를 가기엔 서로 부담이었다. 마스크 속에서 쏟아질 콧물이며 그런 아이를 곁에 두어야 하는 반친구들과 선생님 모두. 학교도 쉬기로 했다.


어서 병원을 갔으면 좋겠는데 월요일은 나도 1교시부터 수업이 있었다. 줌 수업이라 출근은 안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와 병원에 갈 수도 없는 입장. 그런데 오후까지 저대로 두면 더 심해질 것 같아 고민하던 찰나,



음? 혼자 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 큰아이는 9살이다. 학교, 학원이나 슈퍼는 혼자 곧잘 다니지만 그 외에는 혼자 가본 적이 없다. 게다가 병원이라니. 언제나 보호자가 있어야 할 것 같은 병원이라니. 하지만 저 생각이 든 이후로 나는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병원은 아이 미술학원 건너편에 있고 그 건물에 소아과며 치과며 피부과며 다 다녔기에 아이는 익숙하다. 약국도 같은 층에 있다. 진료예약은 앱으로 내가 하면 되고 전화 한통 미리 해놓으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문제는 전혀 없어 보였다. 아이가 용기만 있다면 충분하다.


아이는 내 말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집중하고 일의 순서를 새겨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엄마! 메모를 해야겠어!" 하고는 종이를 찾았다. 그리고는 내말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적었다.




나는 나대로 의사에게 전달할 메시지를 빠르게 적어나갔다. 9시부터 계속 수업이라 마음이 급했다. 아이는 크로스 가방에 휴대폰과 카드, 쪽지를 넣어 출발했다. 어쩐지 그 뒷모습에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아이는 잘 도착해서 진료를 받았다고 했다. 목이 많이 부었다고. 의사는 내게 아이 상태에 대해 적어 답장도 보내왔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혼자 감동했다. 약국에 갔더니 약사와 다른 아저씨 손님이 혼자 왔냐고 다 컸다고 웃으며 칭찬을 해줬다고 했다. 혼자 온 아이를 여러 어른들이 살뜰히 챙겨주었다. 엄마가 일을 하고 있어서 아이는 스스로 무언가 하는 데 익숙하다. 그런 아이에게 너그럽고 따뜻한 동네 어른들이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병원 가는 길에 둘째 아이 친구 엄마도 만났다고 했다.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병원을 같이 가주려고 했다는 친구 엄마. 그 말만 들어도 마음이 뜨끈해졌다.


아이는 혼자 병원에 다녀온 사실에 즐거워했고 동생에게도 자랑을 했다. 나는 혼자 또 새로운 경험을 한 아이를 꽉 안아 주었다.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혼자한 것 같지만 은연중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말이다.



늘 이럴 수는 없을 거다. 나 역시 9살과 7살짜리 형제를 키우며 따뜻함 못지않게 소외와 배제도 자주 경험했다. 아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은 부모나 가정, 그리고 아이 자체에서도 생겨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들에서도 생겨난다. 혼자 나간 아이에게 이런 마음들이 없었다면 아마 아이는 이 경험을 자랑하기보다 얼마나 고되었는지 생각하기 바빴을 것이다.



혼자 해냈지만 혼자서만 해낸 것은 아닌 아이의 일들 앞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장하다, 내 아들! 이렇게 마무리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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