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화분에서 키운 방울토마토. 무심하게 씨를 뿌려둔 게 이렇게 맺혔으니 나는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키워내는 과정이 모두 무심하지는 않았지. 늘 들여다보고 챙겼으니 참 살가운 주인이었다.
아이들은 방울토마토가 맺혔을 때부터 매일 달라지는 토마토 색깔을 확인하며 더 붉어지면 먹겠다고 키득거렸다. 그러다 며칠 전 톡, 하고 거실 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아이들은 토마토를 주워 내게 달려왔다. 나는 첫 알이 떨어졌을 때는 같이 즐거워했지만 두 번째 알부터는 으응 그래애, 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이들의 섬세함을 따르지 못해 미안할 때가 많다. 아직 토마토 몇 알로 이리도 즐거운 아이들인데 나는 너무 멀리 있다. 그런데 이 이상 무엇을 하기는 어려워서 그 마음이 늘 그 자리에 머문다. 그 맴도는 마음을 더 이상 모른 체하면 안된댔는데 여전히 한 걸음 더디다. 방울토마토만의 일은 아니다.
큰아이는 언제나 빠르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감정이 언제나 재빠르다. 빠르게 올라가고 빠르게 내려온다. 흔히들 감정 기복이 심하다거나 업 앤 다운이 있다고 표현하지만 나는 아이의 감정이 재빠르다고 표현하는 편이다. 아이의 감정은 그 자체로서 역동성을 갖고 있다. '감정'은 명사이지만 그 두 글자가 가리키는 것은 어떤 동사보다 더 살아서 날뛴다.
꼭 방울토마토만의 일은 아니라고 했다. 내가 아이의 마음을,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날은 꽤 자주 있다. 나와 같은 시공간에 있는 동안 아이의 감정은 종종 한달음에 저만치 달려간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나를 다시 지나쳐 제자리로 휙, 정말 휙, 날아온다.
나는 아직 영글지 못한 서툰 어른이라 아이의 그 감정을 좇다가 자주 지친다. 방금까지 내 품에 안겼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고 그러다 다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내 마음이 너그러운 날에는 그 전환이 귀엽기만 하고, 내가 일에 치여 있을 때는 그 전환이 버겁다. 한바탕 전쟁을 하다가 혼자 시익 웃으며 내게 다가오는 아이를 안아주지 못할 때, 망설이고 있는 나를 마주할 때 나는 조금 쓸쓸하다.
나로부터 멀찍이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와 히죽거리는 아이를 보며 왜 나는 너와 매 순간 같이 달려줄 수 없는지, 나는 너의 엄마인데 왜 네 전환을 버거워하며 더 뾰족한 각을 세워야 하는지 생각한다. 으레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 스스로를 원망하며 끝나는 이 반복되는 물음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무심하게 뿌린 씨앗으로부터 붉은 방울토마토가 맺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괜히 생각해본다. 툭, 떨어져 굴러 나온 방울토마토로부터 아이의 시간을 생각한다. 자꾸만 달아났다가 또 고무줄처럼 빠르게 튕겨 돌아오는 아이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괜히 코가 아리다.
넌 아직 어린데 왜 나는 자꾸 겁이 날까. 너의 속도와 방향이 어떻든 그저 우리 사이에 끝없이 늘어나는 고무줄이 있다면, 그래서 언제고 휙 돌아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내 마음이 조금 가벼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