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나의 스승은 짐짓 진지한 체 하셨지만 깊은 곳 어딘가에 늘 어떤 유머가 있었던 것 같다. 까마득한 옛날, 고등시절인데도 아직 선생님의 머리칼, 회색 빛이 도는 눈동자가 선명하다. 선생님은 칠판을 빼곡하게 채워 글을 쓰시고 우리가 바쁘게 옮겨 적을 동안 한가운데 의자에 한참을 앉아 계셨다. 멋도 모르던 시절 선생님 안 보여요~ 외쳤지만 선생님은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외침을 듣지 못하셨나 싶어 여러 아이들이 목놓아 외쳤지만 계속 그대로셨다. 그 후로 우리는 선생님 안 보여요 같은 소리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3년 동안 우리는 요리조리 선생님을 피해 칠판에서 글자를 찾았다. 아무 때나 과사무실에 가서 글을 들이밀고 갑자기 글을 가져오라는 말씀에 습작 노트를 들고 갔다. 무섭게 화내지 않아도 무서웠고 슬쩍 웃으셔도 행복했고 먼 산을 보고 계셔도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다.
가방끈 긴 사람들끼리 모여 수많은 선생님들과 사는 날들이지만 사실 정말 스승은 손에 꼽힌다. 늘 이맘때쯤 내 스승이 생각나고 그날들이 생각난다.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아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가만히 지켜보는 마음 가운데 있었을 어떤 유머. 유머라는 말을 즐겨 쓰지 않는데 달리 댈 말이 없는 그런 마음들이 선생님을 견디게 한 게 아닐까.
퇴직하시며 고향으로 내려가신 선생님의 카톡은 예전과 물씬 다른 분위기가 풍긴다. 꼭꼭 숨겨둔 유머가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턱을 괸 사진도, 시집도 다 그렇다. 이런 마음을 꽁꽁 숨기고 꿈쩍 않는 스승으로 살아간 시간을 가늠해본다. 거기에 대면 펄펄 끓는 냄비 같은 나는 좋은 선생은커녕 좋은 부모가 되기도 힘들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