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언니가 있다. 큰애 임신 중 동네 문화센터에서 필라테스를 하다가 처음 만났는데 사실 그때는 눈인사만 했던 것 같다. 얼마후 자연주의 출산 준비 카페에서 동네 사람들끼리 만난 적이 있다. 그 언니가 거기에 또 나타났다. 그이후로 따로 만난 적은 없지만 SNS에서 계속 이어졌다. 초등 교사인 언니의 교단일기를 오랫동안 보았다. 언니의 기록들은 어떤 책을 읽는 것처럼 좋았다. 한동안 언니에게 힘든 일들이 겹쳐 왔다. 그 시기를 알고 있었지만 아는 체 할 수 없었다. 일단락이란 게 있을 수 없는 큰 생채기겠지만 어쨌든 언니는 내게 보기에 여전히, 잘,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언니의 글들을 보며 그 교실을 오래 부러워했다. 언니가 칭하는 이니셜의 아이들에게서 내 아이가 오버랩되기도 했고 눈앞에 그려지는 교실 한가운데 있을 아이들을 상상했다. 학교에서 일하지만 초등과는 거리가 먼 내게 언니의 글은 좋은 상상의 세계였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무엇을 배웠을까. 학교에서 아이는 어떤 배움을 얻었나. 큰아이 초1 무렵 쓴 학교형 인간에 대한 글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 그때 내가 마음 먹었던 것은 학교교육 안에서 어떤 균형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무조건 내빼지 말고 그 과정 중에 있을 지루한 성장을 믿기로 했었다. 내게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아이가 초3이 된 지금은? 다시금 잘 모르겠다.
앞에서 이야기한 언니의 교실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언니는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그 교실을 만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실패했을 때 같이 안타까워하는 것. 그것을 갖고 웃거나 놀리지 않는 것도 하나의 약속이라고 했던가. 그런 것을 일일이 들추어 설명하고 배우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실이 얼마나 될까.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실수를 비웃고 놀린다. 그 놀림이 심해지면 어허, 정도의 경고만이 나가겠지. 왜 그런 태도가 옳지 않은지에 대해 짚어주는 교실이 얼마나 될까. 그런 경험의 반복은 그런 어른을 만든다. 물론 모든 책임을 학교에 지울 생각은 없다. 그러나 가르침이라는 게 숫자나 글자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학교는 작은 사회라는 그 지겨운 비유를 계속 갖다 쓰려면 그런 책임을 일정 부분 지는 게 맞지 않을까.
큰 아이 학년에서는 욕설이 공공연해지고 있는 것 같다. 중고등학생이나 성인처럼 어떤 맥락을 알고 쓴다기보다 그냥 유행어처럼 쓰는 느낌이다. 여기서 또 그런 생각이 든다. 욕에 대해서 학교는 얼마나 이야기를 할까. 그게 왜 나쁜지, 어떤 의미들인지, 감정을 욕으로 처리하는 게 왜 문제인지를 알려줄 생각은 있나. 물론 그걸 알고도 아이들은 나중에 또 다시 쓰겠지. 근데 그게 질적으로 같을까. 들춰내고 꺼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과 어허! 하며 텅 빈 경고만 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그 이후의 결과도 같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육현장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돌아올지 빤하다. 알고 있다. 상황과 여력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또 어떨 때는 모르는 척 하고 싶기도 하다. 대학에서도 같은 교과목에서 전혀 다른 성과가 난다. 일대일의 환경이 아니라 일대 다수의 교실 환경에서도 그 성과란 것은 목적과 방향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요즘은 자꾸, 아이들에게 필요한 배움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