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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Jul 06. 2022

학교에서는 어떤 배움이 있었나




내가 좋아하는 언니가 있다. 큰애 임신 중 동네 문화센터에서 필라테스를 하다가 처음 만났는데 사실 그때는 눈인사만 했던 것 같다. 얼마후 자연주의 출산 준비 카페에서 동네 사람들끼리 만난 적이 있다. 그 언니가 거기에 또 나타났다. 그이후로 따로 만난 적은 없지만 SNS에서 계속 이어졌다. 초등 교사인 언니의 교단일기를 오랫동안 보았다. 언니의 기록들은 어떤 책을 읽는 것처럼 좋았다. 한동안 언니에게 힘든 일들이 겹쳐 왔다. 그 시기를 알고 있었지만 아는 체 할 수 없었다. 일단락이란 게 있을 수 없는 큰 생채기겠지만 어쨌든 언니는 내게 보기에 여전히, 잘,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언니의 글들을 보며 그 교실을 오래 부러워했다. 언니가 칭하는 이니셜의 아이들에게서 내 아이가 오버랩되기도 했고 눈앞에 그려지는 교실 한가운데 있을 아이들을 상상했다. 학교에서 일하지만 초등과는 거리가 먼 내게 언니의 글은 좋은 상상의 세계였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무엇을 배웠을까. 학교에서 아이는 어떤 배움을 얻었나. 큰아이 초1 무렵 쓴 학교형 인간에 대한 글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 그때 내가 마음 먹었던 것은 학교교육 안에서 어떤 균형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무조건 내빼지 말고 그 과정 중에 있을 지루한 성장을 믿기로 했었다. 내게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아이가 초3이 된 지금은? 다시금 잘 모르겠다.



앞에서 이야기한 언니의 교실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언니는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그 교실을 만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실패했을 때 같이 안타까워하는 것. 그것을 갖고 웃거나 놀리지 않는 것도 하나의 약속이라고 했던가. 그런 것을 일일이 들추어 설명하고 배우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실이 얼마나 될까.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실수를 비웃고 놀린다. 그 놀림이 심해지면 어허, 정도의 경고만이 나가겠지. 왜 그런 태도가 옳지 않은지에 대해 짚어주는 교실이 얼마나 될까. 그런 경험의 반복은 그런 어른을 만든다. 물론 모든 책임을 학교에 지울 생각은 없다. 그러나 가르침이라는 게 숫자나 글자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학교는 작은 사회라는 그 지겨운 비유를 계속 갖다 쓰려면 그런 책임을 일정 부분 지는 게 맞지 않을까.



 아이 학년에서는 욕설이 공공연해지고 있는  같다. 중고등학생이나 성인처럼 어떤 맥락을 알고 쓴다기보다 그냥 유행어처럼 쓰는 느낌이다. 여기서  그런 생각이 든다. 욕에 대해서 학교는 얼마나 이야기를 할까. 그게  나쁜지, 어떤 의미들인지, 감정을 욕으로 처리하는   문제인지를 알려줄 생각은 있나. 물론 그걸 알고도 아이들은 나중에  다시 쓰겠지. 근데 그게 질적으로 같을까. 들춰내고 꺼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과 어허! 하며   경고만 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이후의 결과도 같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육현장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돌아올지 빤하다. 알고 있다. 상황과 여력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또 어떨 때는 모르는 척 하고 싶기도 하다. 대학에서도 같은 교과목에서 전혀 다른 성과가 난다. 일대일의 환경이 아니라 일대 다수의 교실 환경에서도 그 성과란 것은 목적과 방향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요즘은 자꾸, 아이들에게 필요한 배움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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