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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Aug 13. 2020

삶의 반경을 넓힌다는 것





이이를 낳고 키우는 시간 속에서 원래의 나는 산산조각 났고 조금 다른, 혹은 전혀 다른 모양으로 다시 맞춰졌다. "나"라는 동일한 존재가 조각나고 다시 퍼즐처럼 끼워 맞춰지는 시간들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을 도려낼 수 없는 이유는, 이 시간들로부터 내 삶의 반경이 넓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삶의 반경을 넓히는 것은 사실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또 다르게는 정상의 범주를 깨 가는 것. 정상이나 표준을 근거로 무언가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것, 혹은 줄이고자 노력하는 것.



난산으로 아이를 낳아 날마다 울 때 나는 으레 그렇듯 모유수유에 목숨을 걸었다. 출산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모유수유라도 해야 정상의 엄마 범주에 들어서는 것만 같아서 더더욱 그랬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당시 모유수유는 엄마됨의 첫 도리처럼 여겨졌달까. 그러나 내 몸은 그마저도 쉽지 않아서 아이와 매일 살을 붙이고 전쟁을 했다. 산후도우미가 밤에 나 몰래 분유를 먹일까봐 전전긍긍하고 잠든 남편을 깨웠다. 모유의 신화 속에서, 난산 속에서 어린 나는 모유를 어떤 절대적인 진리처럼 생각했다. 물론 그 허상에 갇혀 있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깨고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놀아난 나에게, 세상에게 잔뜩 화를 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 시절은 내게 아프다. 아마 아이를 보면서 그 시간을 종종 떠올리기 때문이겠지.



안되는 것에 매달린 나도 그렇지만 안나오는 젖을 땀 뻘뻘 흘리며 빠느라 애닳았을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득해진다. 먹고 자는 것 외엔 다른 욕구가 없던 그 시기를 내 괜한 고집에 애닳으며 보낸 아들을 떠올리며 나 때문에 아이가 더 예민하고 감정적으로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한다. 사실 종종, 보다는 더 자주한다. 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시간들을 들춰본다. 다만 이런 생각들은 나를 나락으로 이끌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생각을 거두려 노력한다.



아이의 시간을 거슬러가며 부모로부터 문제를 찾아내는 과정이 너무나 당연한 육아의 세계에서 그 시절의 힘없는 내가 소환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내내 소환당할 나의 날들이 너무 안쓰럽기도 하다. 어떨 때는 그 당연한 들춰냄이 불쾌하기도 하지만 불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서 그냥 가끔 혼자 숨고 싶어진다. 내 깜냥에 아이 둘이 가당키나 하냐는 질문을 휙 던지며 말이다. 작은아들의 작은 몸을 보며 건강하지 않은 내 몸 때문에 일찍 태어나야 했던 그 때를 떠올리듯 먼 훗날 아이들이 어딘가 삐그덕거리면 내 이 바쁜 나날들을 떠올리게 되겠지. 엄마란 늘 죄스러운 어느 시절을 갖고 있어야 하고 언제나 어떤 맥락에서 소환돼도 이상하지 않을 운명을 가졌다니. 참 별로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과정의 좋은 점을 찾는다. 아이를 키우며 경험한 것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 예상대로 되지 못한다는 것.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을 눈앞에 마주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내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삶이 딱 그만치였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고 함께하는 모든 순간은 그래서 그간의 나를 뛰어넘는 시간들이고 동시에 나의 좁았던 삶을 넓히는 시간들이다. 이제 더더욱 절대적인 것 없고 영원히 내 일인 것도, 영원히 남의 일인 것도 없다. 이것과 저것은 언제나 내게 일어나도 혹은 내게 일어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냥 삶이란 그런 것이다.




슬프지만 딱히 슬플 것도 없는 그런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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