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는 어릴 때부터 손이 많이 갔다. 서랍은 다 열어젖히고 혼자 넘어지고 자빠지고 충전기를 빨고 현관으로 나가 다 뒤집고 주방도구도 다 꺼내고 늘 호기심이 많았고 늘 곧바로 실천했다.
아이들은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작은아이가 태어나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쁜 의미에서 비교가 아니라 이 둘은 매우 달랐다.
큰아이의 넘치는 호기심, 곧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태도는 해가 갈수록 조금 다듬어진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아들에게서 풍기는 "마이웨이"의 짙은 향은 아마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닐까.
얼마 전에도 그랬다.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우는 중에 스케이트를 뒤로 젖히지 말라는데 아들은 계속 "혼자" 스케이트를 젖히며 탔다. 꽤 오래 태권도를 가르쳤던 관장님은 인라인을 가르치다가 허허 웃으셨다. 아이만의 고집이 남다르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수업이 끝나니 결국 브레이크는 부러졌다. 그 많은 아이 중에 우리 아이 브레이크만 부러진 게 싫었고 화가 났다. 얼마 뒤 왜 그랬는지 넌지시 물었다. 그리고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아이는 글자를 거꾸로 쓰거나 집에서 뛰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중에도 뛰거나 아파트 화단의 풀을 손으로 다 훑으며 만지거나 쭈그리고 앉아 죽은 지렁이를 구경하거나 소파에 거꾸로 매달리거나 물감을 만들겠다며 색종이를 찢어 세면대를 채우거나 잔디 물주는 호스 옆에서 같이 뱅글뱅글 돌 때도 늘 그렇게 대답한다.
그냥 하고 싶어.
그때마다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잊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잃은 기분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딱히 반박할 수 없어서 설득되는 것 같으면서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순간들이다.
내 가장 염려는... 앞으로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정확하게는 이 허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제도권에서, 아이의 그런 대답이나 행동은 옆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엄마인 나는 아이만의 고유한 성정을 누구보다 지켜주고 싶지만 또 엄마인 나는 아이가 어느 중간선에 무사히 안착했으면 하는 허상에 빠지기도 한다.
이 지리멸렬한 순간들.
나는 한때 내가 엄청나게 독립적이며 세상의 잣대로부터 자유로운 줄만 알았다. 내 의지로 예고 진학을 결정하고 시험을 보고 내 의지로 그 시간들을 잘 보내서 부끄럽지 않은 대학생활을 하고 끝끝내 버티며 공부를 해온 나를 스스로 조금은 대견스러워했다. 물론 이것은 나 혼자만의 덕은 아니었고 늘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는 엄마 아빠 덕분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매일 고꾸라진다. 아이를 세상에 내놓는 나는, 내가 얼마나 지루한 허상에 갇혀 사는지,아닌 척 하면서 얼마나 절실하게 아이의 평균적 삶을 원하고 있는지 까발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멋진 나, 멋진 여성, 멋진 엄마이고 싶었는데.
뺄셈 틀리는 아들을 쥐어박고
얼굴 시뻘겋게 거꾸로 매달린 아들에게
한숨으로 응한 나는,
틀려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