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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Aug 18. 2020

식물을 잘 기르는 사람은 따로 있다





어떻게 이런 산속에 집을 지으셨을까, 남편이랑 얘기하며 굽이길을 따라 남편 이모댁에 도착했다. 홍천에 집을 지어 가신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처음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양가 어른이 모두 전원주택에 살기 때문에 으레 보는 그런 전원생활을 상상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내 상상은 완전히 깨졌다. 정갈한 집 곁에는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을 너른 땅이 있었고 그곳에 켜켜로 심어진 작물을 보고는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을 두 분이 소일거리삼아 하신다는 게... 내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혼하고 만난 남편네 식구들은 우리 식구와 다른 에너지를 가져서 늘 생경했다. 7년 전쯤 처음 갔던 남편 외할머니댁 옥상의 식물들도 그랬다. 옥상에는 발 디딜 틈없이 많은 식물이 빼곡히 있었다. 하나하나 사연이 있었는데 대체로 어디서 죽어가는 식물을 가져와서 정글처럼 다시 길러낸,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식물과 그 식물의 주인만 다를 뿐 결국 이야기의 끝은 같았다. "이렇게 잘 자라는 걸 괜히 죽일 뻔 했잖어."



젊은이들은 커피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에 언제나 믹스커피 두 봉을 뜯어 타주던 외할머니는 허리가 다 굽어 계셨지만 옥상 식물을 돌보는 일에는 젊은이보다 좋은 힘으로 임하셨다. 그 작은 몸으로 이 많은 식물을 돌볼 수 있다니, 게다가 이렇게 잘 돌볼 수 있다니. 나는 여러 번 감탄했다.



나는 그 뒤로 식물을 잘 기르는 그 어떤 특별한 에너지를 믿게 되었다. 시가에도 언제나 늘 힘센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어디서 한 줌 퍼온 식물들도 자기 자리를 찾아, 있는 힘껏 뿌리를 뻗어 자라났다. 잎의 색만 보아도 이 식물이 얼마나 건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식물을 길러내는 데 도통 관심이 없고 죽이는 데 더 익숙한 내게 식물을 길러내는 그 에너지는 늘 신비로웠다. 그리고 내가 볼 때 우리 남편에게도 그런 기운이 있다.



우리 집 식물은 모두 남편 담당이다. 도무지 관심이 없는 나와 달리, 그런 에너지 속에서 자란 남편은 나와 다른 감수성을 지녔다. 식목일에 산 백일홍이 정말 백일 즈음 뒤에 시들해지자 남편은 여러 번 슬퍼했다. 아이들도 함께 슬퍼했다. 아빠를 닮은 큰아들은 새로 온 식물에게 늘 이름을 지어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어리고 연약한 것에 대해 언제나 같은 마음이라는 걸 여태 모르는 것 같다.) 남편은 며칠 집을 비우게 되면 그 전후로 베란다에서 계속 물소리를 낸다. 그제도 하루 집을 비우는데 한참을 베란다에 있길래 물을 주나 보다, 하고 말았는데 곧 큰소리로 나를 불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 "낭콩이에 콩 열렸다!"





낭콩이는 큰아들이 학교에서 받아온 강낭콩이다. 큰아들이 낭콩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녀석이 이제야 콩을 맺은 것이다. 별관심없이 내다봤지만 내가 살면서 내가 사는 우리집에서 콩이 맺힌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자 곧 마음이 즐거워졌다. 그 광경은 조금 낯설고 또 조금 감동이었다.



남편을 보면 식물을 살게 하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가까운 남편을 보며 남편의 식구를 짐작한다. 여린 식물을 보살피는 게 즐겁다는 어른들, 그 품에서 무성하게 자라나는 식물들을 보면 남편이 가진 시간들이 주렁주렁 마음에 맺힌다. 그런 품에 자라서 아마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그럴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테지. "그럴"이라는 두 글자에 모든 것을 꾹꾹 담아, "그럴"을 암호처럼 남겨두고 싶은 이 마음을 누군가는 알까.



내가 모르고 살았던 그 시간들을 짐작하고 헤아리고 아끼며 내 마음에 "그럴" 두 글자를 심어 본다. 여린 것을 잘 길러내는 남편과 내가 그 시간들을 잇대어가며 잘 키우면, 그러다 보면, 아마 그 암호들이 우리 아이들에게서 또 해독되겠지.



남편과 하는 모든 날이 좋은 것은 아니다. 답답할 때도 있고 혈액형을 인증하듯 이상한 데에 혼자 꽂혀서 갑자기 뾰족해질 때도 있고 차의 연비를 높이겠다고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 간을 졸이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리고 연약한 것을 향한 그 마음은 늘 한결같아서 좋아하는 날이 더 많다.



이런 생각들로 나는,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식물을 향한 특별한 에너지는 따로 있다고 여전히 믿는다. 그게 내가 아니라는 게 좀 아쉽지만 내 그릇은 다른 데서 유용하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 식물을 남편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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