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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Aug 18. 2020

코로나, 2주 간 모든 것은 다시 내 몫이 되었다



다시 멈췄다. 설마 하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아이들은 이제야 겨우 일상에 복귀하기 시작했고 2학기는 그래도 조금 나은 날들이리라 기대했는데 조금 나은 날은 그새 더 멀리 달아나고야 말았다.



아이들은 마스크 없는 외출을 상상하지 않는다. 인적 드문 곳에서 마스크를 벗자고 말하면 날아갈 듯 기뻐하며 정말로 저 멀리로 날아간다. 차에서 밖을 내다보며 마스크 없이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는 왜 저 아저씨는 마스크를 하지 않았냐고 묻는 게 아이들이다. 그 아이와 또 그 부모가,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더 설명할 기운도 없다.



아이들과 보낼 시간이 늘어 좋았던 2월의 어느 날은 자꾸만 길어졌다. 그 날들이 길어지자 좋았던 감정은 사라졌고 우리는 그보다 많이 지쳐갔다. 힘을 얻기 위해 산으로 바다로 들로 다녔지만 그 모든 과정은 결국 집에서의 긴 잠을 거쳐야만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다. 결국은 집이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물리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집이라는 공간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게 정설처럼 굳어졌다.



코로나 이후 가정과 사회가 나눠하던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일은 가정으로 몰려들었다. 문제는 모든 가정이 그 몰빵을 견딜 수 없다는 데 있다. 모든 가정이 늘 회복의 공간이 될 수는 없다. 지 자식 지가 키워야지, 라는 텅 빈 말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가정과 학교, 지역사회가 함께 하던 일들이 가정으로 몰아졌을 때 가정은 빈곤하고 외로운 모서리로 몰아세워진다.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다. 학교라는 공동체는 많은 기능을 담당한다. 그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이 명백하게 옳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게 온라인으로 대체된 학교 수업에서 아이들은 교과지식말고는 달리 어떤 배움을 얻지 못한다. 그럼 그 나머지의 영역은 어쩌나. 따지고 보면 교과지식보다 더 어려운 영역들. 잠재적이면서 명시적이고 나선형이면서 곧은 직선인 그 배움들을 가정에서 어떻게 만져야 할까. 면대면 만남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이 코로나 시대에 가정은 아이들에게 어떠한 기회도 쉽게 줄 수 없다. 그렇다면 가정은 학교나 지역사회가 해왔던 역할을 어디까지 수행할 수 있을까. 이전부터 선택적 홈스쿨링을 해왔던 가정과 달리 갑작스레 모든 것을 떠안게 된 가정들은 그럴 만한 여유도, 힘도 없다. 물론 안 해서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정말 할 수 없는 경우들이 더 많다.



지역사회와 학교의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을 어떠한 대안 없이 가정 안으로 돌려 세우는 것. 어떠한 장치도 없이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것.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안녕을 위한 당연한 처사이지만 그 사이에서 긴급 보육이나 돌봄, 여러 이유로 운영되는 학원으로 아이를 들여보내며 부모가 감내해야 하는 죄책감을 생각하면 이런 멈춤들은 가혹하다. 무엇을 위해 내 아이를 섬처럼 저곳에 떼어두어야 하는가. 부모는 늘 묻고 답하며 견딘다.



다행히 나는 아직 방학이다. 하지만 나의 다행이 어떤 이의 불행이라 늘 마음이 불편하다. 최소 2주 동안 아이들은 다시 내 몫으로, 각 가정의 몫으로 남겨졌다. 학업이나 공동체 같은 경험은 아주 먼 남의 이야기가 되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 날들, 이 지독한 여름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공공 안전 경보가 울렸고 대낮의 아이들은 거실에서 쿵 하고 내걷다가 나한테 불려 혼이 났다.



2주 동안 또 온전히 내 몫으로 남겨진 형제들을 보며 애써 할 말을 찾는다.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코로나 시대에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무탈하면 되는가. 운이 좋아 건강하게 살아남으면, 그거면 된 건가. 사회는 여전히 그런 안녕을 높은 가치로 두는가. 그런 안녕 외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나날들 속에서 우리는 정말 그 안녕만을 바라고 사는가. 그 안녕 뒤에서 벌어지는 격차는 누구의 책임인가. 애초에 격차는 남의 것이었나. 혹시 우리가 더 극심하게 멀어져 가는 것은 아닐까. 종잡을 수 없이, 손잡을 수 없이 점점. 그러면서 우리는 가혹하고 외롭고 뾰족한 시대로 향하는 건 아닐까.



매일 이상한 질문만 남는다.



2주 뒤에 나에겐 무엇이 남겨져 있을까. 아마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 어째 절망뿐인 물음 같아서, 마음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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