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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쉼표 Nov 15. 2021

엄마는 정답이 아니야




나는 당연히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나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그런 내가, 글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대학원에 들어갔고 시작을 했다는 이유로 긴 과정을 마쳤다. 그러는 중에 사실 나는 내 밑바닥을 봤고 동시에 모른 척했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되돌아서 갈 곳도 마땅히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이 우주의 점은 될까. 늘 부족했다.



어떤 철학적 사유와 이론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을 보면서 어떨 때는 경외감을, 어떨 때는 한심함을 느꼈다. 일상과 동떨어진 그 이야기들에, 자기들끼리 모여 열을 올리는 모습이 어떨 때는 존경스러웠고 어떨 때는 부질없어 보였다. 저 또한 다 등 따시고 배 부른 사람들의 말일뿐이지. 내 부족한 공부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내가 아무리 해도 그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혹은 안 들어가도 그만이라는 생각. 자주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런 생각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부족한 사람이다. 논문 투고를 하고 수정 후 게재 판정을 받을 때도, 게재 불가를 받을 때도 내 마음은 비슷했다. 게재 불가를 내린 심사위원들의 평을 읽을 때도 그랬다. 내 논문에 왜 불가 판정을 내렸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 글과 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게재 불가를 내린 논문도 그렇다. 완전히 맞는 것도 완전히 그른 것도 아니다. 살수록 그런 건 잘 없다. 우리는 대부분이 맞고 또 그만큼 틀린다. 정답은 시험지에나 있을 뿐이다.



그런 나는, 아이에게 어떤 사람일까.



코로나로 한참을 밀착된 생활을 했던 우리다. 아이는 책도 나랑 읽고 문제집도 나랑 풀고 공부도 나랑 했다. 이야기도 나랑 했고 내 일상을 함께 했다. 그러다 한동안 아이가 툭툭 뱉는 말속에 나는 푹 잠기고 말았다.



나는 아이 문제집 채점을 할 때 답지를 보지 않는다. 아이가 힘들게 푼 문제를 엄마는 고작 답지를 보면서 채점을 끝내버린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 읽고 풀고 채점을 한다. 초2. 쉽다. 그래서 그냥 한다. 근데 이게 아이에게는 또 다른 의미였던 것 같다. 본인이 30분이나 걸려서 푼 문제를 1분 만에 푸는 엄마. 본인이 한참을 읽고 푼 문제를 휘리릭 채점하는 엄마. 아이에게 나는 정답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내가 채점 실수를 하니,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헐! 엄마도 틀리는 게 있어?"



어떤 날은 내가 '잡수세요'라는 말을 했더니 어원을 묻는다. 글쎄, '먹다'의 높임 표현이라는 것 말고는 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이는 다시 '드세요'랑 비슷한 거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 며칠 뒤 아이는 다시 물었다. "엄마 '잡수다'는 어디서 온 말일까? 내가 생각해봤는데 잡은 잡다의 잡이고, 수는 숟가락을 뜻하나? 그래서 숟가락을 잡으라는 건가? 아니다. 숟가락은 ㄷ받침이 있잖아. 뭘까?" 그러게 뭘까. 나도 그 어원이 궁금해 검색을 해봤는데 어원이 금세 나오지는 않았다. '잡수다'에 관한 국립국어원 글을 한참 읽고 있는데, 아이가 말한다. "와, 진짜 어려운가 보다. 엄마는 내가 쓴 일기는 3초 만에 읽는데 그건 그렇게 오래 읽네? 대체 얼마나 어려운 거야?"



나는 당연히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나는 자주 헤매고 틀리는 사람이다. 일터에서나 일상에서나 나는 오히려 자주 주저앉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에게 엄마인 나는 한동안 정답이었다. 어쩌면 내가 아이 앞에서 한껏, 완전한 척 포즈를 취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그런 나를 보고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잘 짜여진 척 시늉했는지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다. 결국 나는 여전히 어른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아이를 가르치고 훈계하고 감시한다. 우스운 착각이다.



나는 누군가의 정답이 되고 싶지 않다. 정답이  수도 없다. 그러나  의지와 관계없이 아이들은 나를 보고 반짝이는 눈빛과 마음을 보낸다.  부담스러웠던  역할이  부담스러운 이유다. 완전하지 않은데 나를 완전하다고 믿는  애틋한 생들. 가끔 멀찌감치 서서 멍하니 바라보고 싶어지지만 그럴 수도 없다. 내게는 조금 슬픈 일이다. 그저 아이들이 어서 성장해서, 정답인  알았던 엄마가 사실은 구멍 숭숭  그물 같은 사람이었다는 , 사실 품을  있는  얼마 없는 그런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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