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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 이선종 Aug 10. 2021

시골멍 중입니다

캘린더 구속에서 벗어난 일주일

휴가가 필요했다

나도 그렇지만, 모든 사람에게 휴가는 필요하고 중요하다. 2년 전만 하더라도 그 무거운 캐리어가 가볍다는 자기 최면을 하며 지하철로 향했다. 그리고 캐리어를 안고 출근했다. 어쩌면 휴가지에 도착한 순간보다 인천공항을 향하기 위한 여정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COVID-19가 우리의 방식을 바꾼 후 가고 싶은 휴가 방식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그래서 혼자 트래킹 코스에 가서 다리가 떨릴 때까지 걸었다. 처참할 정도로 몸에 피로감이 생기면 일상적인 고민들이 씻은 듯이 해소됐다. 그렇지만 이번엔 더위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매일 폭염 수준으로 내리쬐는 탓에 계속 미뤄졌다. 그러다 생각한 곳이 바로 '시골멍'이다



장인어른 집에 사위가 혼자 왔다

제주도에서 전통 가옥으로 펜션을 하시다 작년에 해남으로 오셨다. 섬이 주는 고독감이 싫으셨다고... 그렇게 연고도 없는 땅끝 마을 해남으로 오셔서 58년 된 구옥을 손 보고, 고쳐서 이렇게 예쁜 집으로 변신시켜 놓으셨다. 예술이 주는 즐거움을 시골 사람들도 알아야 한다며 작은 공방을 여셨다. 독채를 하나 만드셔서 나는 그곳에서 지낸다. 소설가처럼 거기서 혼자 낮잠도 자고, 누워서 책과 영화 보고, 때가 되면 밥 먹으러 안채에 간다. 아버님, 어머님과 밥 먹으며 떠는 수다도 즐겁다. 가장 좋은 건 마당 한편에 있는 벤치에 혼자 앉아서 멍 때리기다.


자연엔 같은 모습이 없더라~

시골멍을 때리고 있다는 건 꽃 한 송이, 청개구리 한 마리, 풀잎 하나를 몇 분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파도도 그렇겠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꽃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약하던, 강하던 매분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같은 모습을 보이면 바로 꺾일 것처럼, 바로 잡힐 것처럼 말이다.


여기 와서 읽으려고 두 권의 책을 빌려왔다. 하나는 뜻밖에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이라고 65세 할머니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CIA에 직접 찾아가 스파이가 되는 미국 소설이다. 뜻밖에 스파이가 된 부인이 벌이는 뜻밖의 이야기로 5시간 만에 다 읽어버렸다. 총 잘 쏘는 미션임파서블 같은 남자 주인공도, 안젤리나 졸리 같은 여자 주인공도 아닌 경청과 세월의 연륜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가벼운 이야기다


두 번째 책은 올웨이즈 데이 원이라고 혁신 기업들의 절대 원칙을 담은 책이다. 아마존의 발명, 페이스북의 피드백, 구글의 협력, 애플의 다듬기, 마이크로소프트의 혁신은 매일을 첫날처럼 생각하는 원칙 때문에 유지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근데 나 시골멍 쓰려고 브런치를 켰는데 왜 이런 내용을 쓰는 건지...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 ㅠ 아 흔들리는 꽃을 보고 생각났다. 꺾이지 않으려면 매일 매분 새로워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귀촌 생활까지는 아니지만 체험하고 있다

오늘 아침은 5 30분에 일어나서 이곳 주변을 1시간가량 산책했다. 해뜨기 전부터 농사일을 하시는 농부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좋은 아침을 기원해주는 서로의 인사를 보며 몸도 마음도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게 4km 정도를 걷고 화단에 밤새 자란 버섯을 뽑고, 잡초를 뽑는다. 오후 6시가 되면  있는 식물들에 물을 흠뻑 주신다. 그렇게 생명들은 이곳에서 터를 잡고 자라나고 있다. 지난 2월에 왔을 때보다  생동감 있는 공간이 되었다. 작지만 과일나무도 생겼고...  


어쩌면 내게 이런 시골멍이 필요했던 것 같다

예전부터 이 일을 하며 일정이 빈 시간에 불안감을 느꼈다. 빠듯하고, 빡빡하게 하루를 보내야 만족스러운 하루였고, 그렇지 않으면 걱정이 됐다. 그런 강박이 반드시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 떨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캘린더 구속에서 벗어난 일주일이 내게 필요했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 삶. 내가 이걸 쓰다가 또 뭘 하고 싶은지 나도 모른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세상에 피해 주지 않는 행복한 일주일을 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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