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_잡학스런 공동체이야기
08_잡학스런 공동체이야기
≪아나스타시아(Anastasia)≫의 실현
페레스트로이카의 질문, 숲의 답변
1980∼90년대 러시아의 격변기를 직접 경험했던 블라지미르 메그레는 페레스트로이카와 시장경제 도입 과정에서 사회적 혼란을 경험했다. 기업가로 성공을 거둔 메그레는 “물질적 풍요가 과연 행복을 보장하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훗날 그가 숲 속에서 아나스타시아를 만나 새로운 삶의 길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나스타시아는 인간이 본래 자연과 교감하며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나스타시아 철학은 단순한 자연 예찬을 넘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주적 생태관을 담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한 가족이 세대를 이어 돌보는 1헥타르 규모의 땅을 통해 삶과 자연, 영혼이 조화를 이루며 연결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단순한 생활 방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과 문명의 방향을 다시 묻는 철학적 제안이었다. 그 제안이 킨즈 도메인이었다.
러시아의 전통에서 찾은 지혜, 킨즈 도메인
킨즈 도메인은 한 가족이 평생 대를 이어 물려주며 살아가는 최소 1헥타르(약 3,000평)의 땅을 자급·순환 가능한 생태정원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는 단순히 농업적 자립을 넘어, 인간과 자연, 가족과 후손이 영속적으로 이어지는 삶의 터전이다.
여기서 “도메인(domain)”은 단순한 토지가 아니라, 가문의 역사와 영혼이 깃드는 공간이며, 인간이 자연과 우주와 맺는 근본적 계약의 장소로 이해된다.
아나스타시아의 메시지는 인간이 본래 자연과 직접 교감하며 삶을 창조하는 존재라는 전제를 담고 있다.
그녀는 “인간이 창조한 가장 완전한 예술품은 자연과 하나 된 자신의 삶”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의 삶이 예술이 될 수 있으며, 그 완성은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가능하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킨즈 도메인은 러시아 전통 농촌의 호모스테드(자급 농가 체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슬라브 문화에 남아 있는 조상 숭배 전통과 성스러운 숲에 대한 관념 역시 이 철학의 밑바탕을 이룬다. 따라서 이는 전통과 영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헥타르에 그린 삶의 청사진
킨즈 도메인의 구체적 설계와 구성 요소는 매우 체계적이다. 우선 공간 구조의 기본 단위는 1헥타르이다. 블라지미르 메그레는 이 면적이 한 가족이 세대를 이어 자급하며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규모라고 보았다. 이 안에는 숲과 과수원, 텃밭, 집터, 연못이 함께 배치되며, 전체가 유기적 순환 체계를 이루도록 설계된다. 특히 도메인의 사방 경계에는 참나무와 가문비나무 같은 전통 수종을 혼합해 숲을 조성한다. 이는 방풍과 방음 기능을 할 뿐 아니라, 탄소 흡수와 야생 동물의 서식지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메인 내부에는 연못을 두어 빗물과 지하수를 모으고, 이를 자연정화 시스템을 통해 관리함으로써 공동체 전체의 수자원을 자급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주거 공간 역시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다. 집은 통나무와 흙, 짚과 같은 자연 소재로 지어지고, 난방과 에너지도 가능한 한 스스로 충당하는 방식을 따른다.
운영 방식 또한 생태적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농업은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는 무농약·자연농법을 원칙으로 하며, 씨앗을 직접 수확하고 보존해 땅의 자정 능력을 존중한다. 경제 활동은 현금 의존도를 최소화하면서, 잉여 생산물을 이웃과 나누거나 교환하는 생태경제가 실천된다. 일부 공동체에서는 지역화폐나 물물교환을 시도하며, 경제가 공동체적 신뢰와 나눔 속에서 운영된다. 교육과 문화 영역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아이들은 숲과 하늘, 별과 직접 교감하면서 배우고 성장하며, 삶의 모든 과정에서 자연이 교사가 된다. 예술과 음악, 의례는 일상과 분리된 별도의 영역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공동체적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이와 같이 킨즈 도메인은 한 가족이 대를 이어 자연과 우주와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설계된 1헥타르 규모의 영속적 생태정원이다. 이는 블라지미르 메그레가 제안한 생태문명적 삶의 구체적 모델이자, 오늘날 전 지구적 공동체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정원은 별과 교신하는 안테나
킨즈 도메인이 지닌 사회적·철학적 의미는 단순한 대안적 생활방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곧 생태문명 전환의 구체적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곳의 삶은 탈성장을 지향하며, 외부 에너지와 상품에 대한 의존을 최소화한다. 또한 지역에서 생산과 소비가 순환하는 경제 구조를 통해 탄소중립에 가까운 생활양식을 실천한다. 이는 현대 문명이 안고 있는 자원 고갈과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평가된다.
또한 킨즈 도메인은 영속적 공동체의 기반을 마련한다. 도메인의 토지는 매매나 양도가 불가능한 가문의 땅으로 설정된다. 따라서 땅은 단순히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가족이 세대를 이어 살아갈 삶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방식은 공동체가 일시적 실험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무엇보다도 킨즈 도메인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한다. 땅은 더 이상 단순한 생산 수단이 아니라, 가족·조상·후손과 맺는 영적 계약으로 여겨진다. 이 안에서 인간은 땅과 영혼을 일체로 경험하며, 자신의 삶이 더 큰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아나스타시아는 이를 “정원은 별과 교신하는 안테나”라고 표현했다. 즉, 도메인은 인간이 단지 생존을 위해 사는 공간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 에너지와 직접 연결되는 장(場)으로 해석된다. 이런 맥락에서 킨즈 도메인은 물질적 대안 모델을 넘어, 인간의 존재 의미와 영적 차원을 회복하는 길을 보여준다.
가족정원의 꿈, 공동체의 현실로
≪아나스타시아≫가 세상에 나온 이후, 러시아 사회에는 빠른 속도로 변화가 일어났다.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른바 ‘아나스타시아 운동(Ringing Cedars Movement)’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 결과 러시아 전역에 수천 개의 킨즈 도메인 정착지가 만들어졌다. 단순히 개인적인 실험에 머무르지 않고, 일부 지역에서는 2003년 이후 주법을 통해 토지 무상 임대와 양도가 가능하도록 제도적 인정까지 이루어졌다. 이는 도메인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제 사회 속에서 제도적 틀을 갖춘 생활 방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흐름은 곧 국경을 넘어섰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등지에서도 유사한 정착지와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생겨나며, 운동은 국제적 차원으로 확산되었다. 각국에서는 생태공동체 운동, 귀농 운동, 대안 마을 실험이라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었고, 아나스타시아가 강조한 가족정원과 생태적 삶의 원리가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동했다. 한국에서도 소규모지만 귀농 운동이나 생태마을 실험과 접목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어, 킨즈 도메인의 비전은 점차 보편적 담론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숲의 비전, 현실의 벽
킨즈 도메인은 생태문명적 대안 모델로 주목받지만, 동시에 여러 한계와 비판도 제기된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은 경제적 자립의 현실성이다. 대규모 도시 인구가 장기간 이주해 자급적 삶을 영위하기에는 여전히 구조적 제약이 크다. 농업과 자급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복잡한 경제 체계 속에서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또 다른 문제는 과학적 검증의 부족이다. 아나스타시아가 전한 메시지 가운데 별과의 교신이나 씨앗이 정보를 기억한다는 주장 등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엄밀한 과학적 입증은 부족하다. 이러한 요소는 운동 전체가 신비주의로 치부될 위험을 안고 있으며, 실제 연구나 정책에 반영되는 데 제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갈등과 제도적 한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공동체 내부에서 나타나는 의견 충돌이나 운영 방식의 차이, 토지 소유권 문제는 지속적인 긴장의 원인이 된다. 또한 교육과 의료와 같은 기본적인 사회 서비스 접근성이 부족하다는 점은 정착 공동체가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결국 킨즈 도메인은 인간과 자연을 잇는 매혹적인 비전을 제시하지만, 그것이 전면적으로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여전히 경제적, 과학적, 사회적 측면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나고 있다.
https://youtu.be/utaGgtksAeQ?si=NE8a5_irbdNsOaZ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