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mplexArea Nov 08. 2017

[독서노트]<젠더 트러블> 발제(4)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발제: 169-195쪽까지

. 2부 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모태의 생산(2) 

         


제2부 2장 라캉, 리비에르 그리고 가면전략

라캉의 이론에서 상징계는 흔히 ‘아버지 법’ ‘아버지 이름’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입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열겨된 단어의 뉘앙스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모종의 권위를 내포하고 있다. 이 특권화된 기표들은 ‘주인기표’로 불리는 것들로, 구멍난 의미망을 일시적으로 꿰메어 미끄러지는 의미를 고정시키는 기표들이다. 1장 발제에서 직접 다루진 않았지만―1장 발제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젠더 트러블』 168쪽 두 번째 문단을 참고하길 바란다―이 기표는 태성적으로 결함을 가진다.      


주체의 근거가 되는 최초의 억압을 통해 본래의 주이상는 상실된다. 대신 그와 비슷하게 기표로부터 차단당하고, 기표가 의미하는 것 안에서 회복할 수 없는 쾌팍의 회복을 추구하는 기호가 등장한다.(『젠더 트러블』, 168쪽)     


여기서 많은 부분을 논의 할 수 없지만―고백하자면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떤 원형적인 쾌락을 포기한다는 것, 일종의 소외와 분리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상징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아버지 법(권위/언어)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꽉찬 욕망은 절대로 획득할 수 없는 ‘주이상스’로 남는다. 굳이 다시 1장으로 돌아가 위의 인용문을 검토한 것은 바로 2장에서 주요 검토 대상인 ‘팔루스’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버틀러는 팔루스‘임(being)’과 팔루스‘가짐(having)'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팔루스란 앞서 얘기한 주인기표(특권화된 기표)이다.      


팔루스‘임’은 타자의 욕망에‘기표’가 된다는 것이고, 또한 기표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대상, 즉(이성애화된) 남성적 욕망의 타자가 될 뿐 아니라, 그 욕망을 재현하거나 반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젠더 트러블』, 169-170쪽)     


팔루스 ‘임’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표’가 된다는 것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남성적 욕망’의 매커니즘 아래에서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있다. 기표의 중요성은, 우리가 상징계에 진입한 순간부터 모든 것(의미)은 기표의 연쇄(환유적) 작용으로부터 파생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라캉은 기표의 우위를 말하는데, 소쉬르 기호론에서 보여지는 기표와 기의(의미) 사이의 일대일 대응은 라캉의 언어이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여러 개의 주인기표―자유주의, 페미니즘, 맑스주의 등―아래에서 과연 자유의 의미(기의)는 같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고정된 의미는 주인기표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의미들을 간신히 붙잡으려는 노력의 효과들은 아닐까?

결국 여성의 팔루스‘임’은 남성성의 한계가 아니라 이론화의 장소인 셈이다. 그러니까 타자, 부재, 결핍으로써의 여성성은 남성주체가 확인해야 할 타자(대상)이며 그에 따른 타자(여성성)는 확정된 의미에서 팔루스여야 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구멍난 기표를 가지게 되는 것인데 남성주체는 대상으로서의 팔루스(팔루스‘임’)를 가짐으로써 주체로 표상되는 것이다.

기표로서의 주체(남성적 위치/팔루스 가짐)와 기의로서의 대상(여성적 위치/팔루스 임)을 전제로 하는 이러한 체계는 상징계의 위치변경 이전에 서구 철학사의 이분법 안에 이미 놓여 있다. 페미니즘이 라캉을 겨냥하는 것 또한 이 부분일 것이다. 라캉에게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억압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러한 배제된 성적 위치를 토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일차적으로 억압을 인정해야하는, 그렇기에 이 억압을 은폐하고 만다.

그러나 확증을 주는 기호로서 여성은 다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일차적 억압을 통해 군림하는 (주인)기표는 앞서 검토하였듯이 모성적 쾌락에 대한 억압을 기초로 한다. 흔히 말하는 근친상간적 쾌락에 대한 억압(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문제는 이 억압된 것의 회귀(트라우마/외상), 강력한 주인기표마저 메울 수 없었던 구멍에서 침투해오는 ‘실재’말이다. 이 회귀하는 것은 억압 이전의 완전한 쾌락, 즉 주이상스를 회복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이다. 후기 라캉에 대한 현대적 독해로서 ‘여성적 주체’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하다(슬로베니아 학파 저서 참고). 여기서 말하는 여성적 주체는 상징계에 종속된 ‘남성적 주체’와 대립되는 즉 향유(주이상스) 주체이기에 새로운 윤리주체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여성은 남성 주체의 구조물을 보증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그것의 환영을 깨버릴 전복적 힘을 보유한 것으로 등장한다.

‘팔루스이다’가 언제나 남성주체를 위한 존재로 인식되는지는 중요하다. ‘이다’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것의 의미는 외부에서 규정된 것으로써 파악된다. 즉 ‘팔루스이다’는 아버지 법(주인기표)에 의해 의미가 된 것으로 즉, 법의 반영물인 동시에 법이 존립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법을 완전히 반영할 수 없는 한―구멍 없는 의미망은 불가능하다― 이 팔루스‘임’은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말년 프로이트에게도 여성의 욕망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점 중 하나였다. 그리고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구조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제기한다.

다른 한편, 남성은 팔루스를 가진다. 그러나 이것이 곧 팔루스‘이다’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실 ‘가진다’의 위치는 필연적으로 불가능한 위치이다. 더 정확한 의미로는 주체가 성립되기 위한 전제적 불가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캉 이론에서 ‘이다’와 ‘가지다’는 결론적으로 실패를 야기한다. 법을 완전히 반영할 수 없는 ‘이다’의 불만족스러움. 그리고 자신이 원초적 아버지가 될 수 없기에 팔루스를 ‘가질’ 수 없는 것이 남성‘주체’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질 부분은 왜, 여성만이 “팔루스처럼, 즉 팔루스를 체현하고 확증해줄 결핍처럼 ‘보이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라캉의 대답은 여성적 위치로 표현되는 위장, 즉 가면이다.     

이런 관계는(팔루스)이기와 (팔루스)가지기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라고 말해두자. 왜냐하면 이들 관계는 한편으로 그 기표 속의 주체에게 현실성을 주고, 다른 한편으론 의미를 만들기 위해 그 관계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모순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어떤 기표, 즉 팔루스를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젠더 트러블』, 174쪽)     


여성에게는 ‘보인다’는 것이 ‘가진다’는 것을 대체한다. 일단 라캉의 전제(정신분석학의 전제)에서 여성은 팔루스를 가질 수 없는 결핍으로 이해된다. 그렇기에 라캉은 여성이 주체로서의 현실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종의 위장(가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면이론을 검토하면 페미니즘에 유의미할 어떤 토대를 발견하게 된다. 가면의 존재론이 외양의 작용으로 설명된다면, 그 가면 뒤, 그러니까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적 경제화에 의해 은폐되고 가려진, 가면에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즉, 이리가레가 후기 라캉을 독해하면서 끈질기게 사유했던 그 지점. “다시 말해 정말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적 의미화 경제의 종국적 파열이나 위치 변경을 약속할 여성적 욕망이나 요구가 있다는 주장”이 아닐까?

라캉의 모호한 분석구조는 오늘날 라캉 독해의 한 분기점을 마련해준다. 하나는 가면이 성적 존재론의 수행적 차원의 효과, 즉 가면 아래 어떤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는 입장이 있다. 다른 한편, 남근 경제에서 가면은 재현 불가능한 여성적 욕망의 부정으로도 읽힐 수 있다. 버틀러의 입장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패러디적인 (탈)구성을 써서 젠더 존재론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는 첫 번째 입장이다. 부분적이긴 하나 이성애의 ‘코미디적 차원’의 극단화된 형태로 ‘보이는 것’과 ‘존재한는 것’ 간의 유동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담이지만 이성애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텍스트가 있으니 참고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흔히 “성관계는 없다”라는 문장으로 자주 표현되는 후기 라캉에 대한 급진적 해석. 슬라보예지젝 외 『성관계는 없다- 성적 차이에 관한 라캉주의적 탐구』 참고 ― 두 번째 해석은 아마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페미니즘의 전략을―“남근 경제라는 관점에서 억압되어온 여성 욕망은 무엇이든 복원하거나 해방시키기 위해, 가면 벗기기라는 페미니즘의 전략―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이후 논의에서 라캉의 가면이론과 리비에르의 「가면으로서의 여성성」을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발제자(글쓴이)의 역량부족으로 그 부분은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라캉 관련 텍스트를 꽤나 전에 읽었던 탓고 있고 특히나 리비에르라는 이론가를 전혀 모르기에 저의 능력으로써는 무리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더 공부하겠습니다.
**178쪽 일부-190쪽 일부     


라캉의 담론에서 ‘분리’개념은 주체가 형성에 있어 근본조건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리는 항상 법의 결과로써 나타난다. 이 발제문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가면이론의 핵심 역시 ‘법’이다. 가면이 억압된 여성 욕망의 결과인가? 혹은 팔루스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결핍을 부인한 결과인가? 아니면 가면은 남성성의 필연적인 실패를 폭로할 주어진 여성성을 감추는 것일까? 라캉이 담론 이전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론인가? 버틀러가 2장 막바지에 검토하고 있는 것은 라캉 이론에서의 법, 즉 실패를 보장하는 법이다.

계속해서 검토하였듯이 상징계는 조건상(환영적 구조)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다. 그러나 라캉 이론에서 주체는 반드시 이 법 앞에 복종해야한다. “‘법 앞에서의’ 필연적인 실패와 충족될 수 없는 사법적 명령”이 상징계와 우리 주체의 숙명인 셈이다. 물론 슬로베니아 학파(예컨대 지젝)의 경우 이러한 불가능성을 급진적으로 해석하지만, 버틀러의 눈으로 비춰본 라캉의 이론은 일종의 ‘노예의 도덕’이다. 법은 영원한 불가능성만 구성할 뿐이지 생산적인 권력으로써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체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그’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푸코가 「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이들에 의해서, 이런 원칙들의 이름으로, 이런 목표들을 위해, 이런 절차를 통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위해, 그들에 의해 통치 당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결코 그는 통치성 바깥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버틀러 또한 라캉의 이론(법)을 거부하고 그 바깥으로, 어떤 진실되고 어떤 본질로의 이행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책 서두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수차례 언급했을 것이다. 버틀러가 얘기하는 젠더범주의 트러블적인 성격, 그리고 성/젠더/섹슈얼리티는 이미 젠더화(담론화)되어 있다던 바로 그 주장! 버틀러는 결코 완벽하게 포섭되지 않을 정체성 범주에서 교란 가능성을 확인한다(그렇기에 젠더는 트러블적‘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다른’ 담론의 가능성,  ‘다른’ 법의 가능성을 묻는, 즉 이런 식으로 통치받지 않을 가능성을 요구하는 정치적 물음이다.





작가의 이전글 [독서노트] 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