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와 약속된 2년의 계약기간이 끝이 났다. 시작할 당시에 잔뜩 주눅 들었던 상태에서 벗어났다. 몇 가지 업무에서 성과가 있었고 상사로부터 인정도 받는 직원이 되어 있었다. 빌빌대며 기획서 한 장을 쓰기도 버거웠던 모습은 사라지고 나는 성장해 있었다. 신이 났다. 결국은 아름답게 마무리되는구나. 동료들은 더는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보여주었다. 나는 외롭지 않았구나. 다시 실업급여를 받으며 자유의 시간을 만끽할 요량이었다. 힘주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비로소 찾아볼 기회라 여겼다.
회사에서 정규직을 구하는 공고가 올라왔으니 지원해 보라고 동료로부터 연락이 왔다. 회사 내 대부분의 계약직이 지원하여 정규직은 경쟁이 치열할 것이다. 하지만 안정된 월급과 복지, 신분이 보장되는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나는 흔들렸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여기가 아니면 어디에서 이 정도의 복지를 누리며 일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젠 정말 나다운 일을 해보고 싶은걸. 어느 정도 인정받고 일의 감각이 있을 때 도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시 다람쥐 쳇바퀴 굴리는 생활로 돌아가겠단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여기가 아니면, 나에게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고민을 반복하다 결국은 입사지원서를 작성했다. 정규직 한 명을 구하는 채용에 결국 내가 선택이 되었다.
새로운 부서의 일과 사람들에 적응하며 1년을 보냈다. 많이 웃고 힘주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구석자리를 지키던 계약직 직원이었는데 정규직의 명함이 생기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 마음은 잘 알고 있었다. 함께 웃고 떠들었지만 나는 그들과 다르다.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지성과 다정함이 부족한 부모님, 겨우겨우 대학을 졸업한 것, 운동권이었다는 것, 결혼하지 않은 것. 나는 이곳에 있는 모두와 달랐고 그것이 부끄러움이 되었다. 같은 종류의 사람이 된 듯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들통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사실 나는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자리는 내 것이 아니다. 더 열심히 해서 채워야 한다. 노력해서 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끝이 없다. 일정한 기간의 정함이 없는 노동자. 끝이 없다는 것은 절망이었다.
사실 상황의 탓이 아니었다.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욕심이 자꾸 생겼다.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기를 가난하게 보냈다. 어느 날 돈이 생기면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맛있는 것을 먹었다. 일 년을 모아 여행을 떠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월급이 생기며 모든 빚을 갚았다. 갑자기 돈을 모으고 싶어졌다. 주식이 하고 싶어졌다. 노후가 걱정이 되었다. 세속적인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인정받고 싶어졌다. 늦게 시작했으니 더 서둘러야 한다. 더 늙기 전에 돈과 명예를 얻고 싶었다. 쉬지 않고 일했다. 박사학위를 받았다. 잠을 줄였다. 나는 더 멀리, 높이 나아가겠다고, 매일매일 결심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회사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는데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가슴이 답답했다. 시원하게 숨을 쉬고 싶은데 명치에 무언가 걸린 느낌이다. 숨 쉴 때마다 조그만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무실을 빠져나와 담배를 자주 피웠다. 담배연기와 함께 겨우 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가슴이 계속 답답했다. 쿵쾅쿵쾅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건 아닌지 머리는 쉼 없이 돌아간다. 실수를 해선 안돼. 실망시켜선 안돼.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고 싶진 않아. 느닷없이 찾아온 불안은 몇 달 동안 나를 감싸고 있었다. 이렇게 얼마를 더 버틸 수 있을까. 일 년, 아니면 한 달.
불안, 나를 지배하는 감정. 대상이 분명하지 않는 두려움. 일상의 행복을 갉아먹는 강력한 힘을 지닌 감정. 겉으론 괜찮아 보이지만 마음에는 폭풍우가 일고 있다. 폭풍우 사이에서 나 홀로 남아 무언가에 맞서 싸우고 있다. 입을 앙 다물고, 주먹을 꽉 쥐고, 기를 쓰고 있지만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불안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적인 감정이다. 인간은 불안을 느끼기에 위험을 피하며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꼼꼼하게 무언가를 준비하면, 내일 더 큰 불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어수선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나에게 불안은 전혀 기능적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복잡하고 취약한 인간이었던가. 물리적으로 가장 안정된 상황에 왜 불안이 시작되는가. 성과를 강조하는 능력주의 사회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깊은 곳에는 더 많은 인정을 추구하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나의 얄팍한 욕망이 있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명상을 하면 그 순간은 나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세상이 그대로인데 명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