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관찰 평 누구나 평론
2년 전 겨울 나는 이런 글을 끄적끄적# 작업 전에 전쟁을 읽고 끄적끄적.
이미지 홍수 시대에 내가 어떤 포지션에서 어떤 작업을 할 것인가?
모든 작품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작품의 가치는 같지 않으며, 그 사회적 의미는 다르다.
사회적 기준에서 어떤 작품은 무의미한 낙서이거나 시대에 조응하지 못하여 맥락 없는 자기 반복의 결과물일 수 있다.
스마트 폰 시대에 우편과 전보(아직 있을까)만이 최선인 것으로 소통하는 착각은 그 가치가 없다.
때문에 이미지의 역사적 발전과정 속에서 내 어떤 관점과 기준을 형성해갈 것인가의 문제는 곧 어떤 가치 있는 작품을 할 것인가와 맞닿아 있다.
좋은 작품에 조응하는 관점의 기준의 형성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가 이 책을 읽게 한 것이다. 책 한 권이 내가 만드는 작품에서 한 가지 색으로 녹아들어 갈 것이다.
오늘 읽은 부분은 서문과 수잔 손택 부분(부르디외 등 총 10 부분으로 되어있다)이다. 2000년에 발간된 책을 무려 20년이 지나 읽고 있지만 2000년 나는 이 책을 몰라고 알아도 당시 내 관심의 대상이 아니어서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읽는다는 것을 다행이라 여긴다.
손택 부분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3개이다.
첫째 캠프와 키치의 구분이다. 캠프는 "케케묵거나 속된 것이 오히려 멋있다고 보기", "기상천외환 것이나 케케묵은 것 또는 속된 것의 좋은 점을 인정하기(살리기), 그러한 태도, 행동, 예술표현"이라고 이 책에서 저자 강준만은 인용하여 말한다.
캠프는 경합한 것에 진지하고 진지한 것에 경박하다. 키치는 진짜를 흉내 낸 조잡하고 촌스런 모조품과 이에 대한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임에 반해 캠프는 모방과 흉내내기가 아니다. 그동안 캠프를 키치라고 여기며 행위하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키치의 기원도 어렵지만, 캠프도 난해하지만 흥미롭다.
둘째, 해석에 반대한다는 손택의 생각
손택은 내용의 집중해 의미를 찾는 문학, 예술 비평의 종언을 고했다. 손택은 대부분의 경우 해석은 예술작품을 그대로 남겨 두는 것에 대한 속물적 거부라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감각적 경험에서 출발하기보다, 해석이 뭔가를 씌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으로 고착되어 손택이 이를 거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은유의 병폐
손택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은유로 가장 많이 사용된 병은 폐결핵과 암이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현대 전체주의 운동은 병과 관련된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치는 다른 민족과 피가 섞인 사람을 매독환자로,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 암이라고 표현하고 중국 4인방을 중국의 암으로 은유했다. 이승만도 공산당을 콜레라로 비유했다.
손택에게 어떤 현상을 암으로 묘사하는 건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며 가혹한 조치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