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이른 저녁을 먹고 정원일을 잠깐 했을 뿐인데(물론, 그 '잠깐'이란 시간의 잣대는 전적으로 내 기준이고, 남편 입장에선 제법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 둘의 모습은 꼭 비 맞은 장닭 같았다.
워낙 더운 날씨라 일의 양과는 상관없이, 둘 다 땀에 절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남편이 툭 던지듯 말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자책처럼 들리기도 하고, 일 시킨 마누라를 원망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순간 나는 뾰족한 각을 꺼내 들었다.
"아니 그럼, 이렇게 안 살면 어떻게 살 건데?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데? 날마다 빈둥거리며 살고 싶은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샤워를 마친 뒤에는 금세 마음이 차분해졌다.
문득 나도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정말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그 말은, 어쩌면 진짜 지치고 힘들 때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절박한 심정 아닐까.
그렇다면, 남편에게 시골살이는 생각보다 버거운 일인가 보다.
사실 나도 시골살이가 만만하다고는 못 한다.
그런데 나는 ‘기꺼이 꽃들의 노예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고생 없는 행복은 없다는 믿음,
손으로 흙을 일구며 생의 의미를 찾는 즐거움,
그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둘 다 도시보다 시골을 좋아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남편의 투정은 뭘까?
‘좀 더 멋지게 살아보고 싶은 열망’일까,
아니면 ‘얼마 남지 않은 삶, 굳이 이리 고되게 살아야 하나’ 싶은 허무일까?
40여 년 함께 산 내가 보기에, 그 말의 무게는 후자 쪽에 가깝다.
사실 귀촌 후 여러 해 동안 남편은
“꽃밭 늘리지 마라, 잔디 좀 그만 심어라, 풀 뽑지 마라”
잔소리를 숱하게 해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꿋꿋이 내 고집을 지켰고,
잔디를 심고 꽃을 심고, 그렇게 지금의 정원을 만들어 왔다.
결국엔 그 손을 들어준 것도 남편이면서
막상 일 앞에선 한발 물러서 있는 그와
티격태격하는 게 우리 일상이 되어버렸다.
노년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해진 정답은 없지만,
나는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살고 싶다.
힘든 줄 뻔히 알면서도 꽃밭을 가꾸는 이유는,
이 지구의 한 모퉁이라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서다.
산을 오르며 쓰레기를 줍는 것도
지구의 한 귀퉁이라도 깨끗하게 남기고 싶어서다.
남편도 언젠가
정원생활자로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간다면—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같은 허무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그날이 오기를 조용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