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자리
이른 저녁을 먹고 정원일하는 것은 우리 부부의 루틴이 된 지 오래다.
어제는 모처럼 해 떨어지기 전에 손을 털자했더니 남편이 "당신이 웬일이야?" 하며 무척 반가워했다.
억지로 일하는 남편도 안쓰럽지만, 일하기 싫어하는 남편을 지켜보는 마음도 편치는 않다.
하루 서너 시간쯤,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는 없는 걸까.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고, 종일 뒹구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사실 축복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시골살이 8년, 큰 다툼 없이 잘 지냈다고 자부하는 쪽은 남편이다.
우리만큼 궁합이 잘 맞는 부부도 없을 거라며 웃는다.
내가 속 터지는 걸 모를 리 없건만, 그 말에 또 웃게 된다.
어쨌든, 어제는 평소보다 일찍 호미를 놓고 정원 몇 곳을 둘러보았다.
망종화 가지치기한 것들, 예초기로 밀어낸 낮달맞이들까지 꽃길에 누워 있긴 했지만, 시선은 시원했다.
꽉 찬 것보다는 틈이 있어야 마음도, 시선도 여유롭다는 걸 알겠다.
처음엔 흙이 보이지 않는 게 좋은 줄 알았다.
그래서 빈 땅이 보이면 어떻게든 뭔가를 심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바람구멍이 있어야 식물도 좋고, 바라보는 이의 마음도 넉넉해진다는 것을.
정원에도 비움의 철학이 필요했던 거다.
마흔이 넘어서야 미니멀한 삶을 추구했듯,
정원생활 8년을 지나고 나서야 비움의 필요를 실감하게 된다.
무엇이든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면 숨이 막히고,
혹시라도 더 소중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집 안 살림이나 정원에서만 비움이 필요할까.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걱정, 지나간 감정, 이미 떠난 아픔을 껴안고 있으면 지금 여기를 바라볼 여백이 없다.
때로는 비워야 한다.
그래야 가볍게 걸을 수 있고,
새로운 기쁨이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