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서있는 배추
아침 산행을 하다 보면 늘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던 어르신을 가끔 마주치곤 했다. 여든 초반쯤 되어 보였지만, 누구보다 다부진 걸음이었다.
“저 분 누구야?”
함께 산을 오르던 언니에게 묻자,
“잉, 나도 잘 모르는데… 회관 아랫집에 사셨던 분 이래. 서울로 이사 가셨다가 가끔 내려오셔서 저리 부지런하게 가꾸시네.”
하는 답이 돌아왔다.
어르신의 밭이 산행길 바로 곁이라, 이른 아침마다 그분의 뒷모습을 자주 보았다.
서울에서 장성까지 오가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러나 내려오셨다 하면 집 정리며 텃밭 가꾸는 일을 어느 젊은 사람 못지않게 해내셨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자전거에 바구니를 달고 밭으로 향하는 땀 젖은 등허리를 보며,
‘사람은 저렇게 살아야 건강하게 사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가을이 깊어갈 즈음, 그 정성스레 키우시던 무와 배추가 그대로 밭에 서 있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채, 계절을 견디고 있었다.
“언니, 그 어르신 요새 통 안 보이셔?”
“잉… 아프시대. 갑자기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다더라.”
사람의 삶이란 참, 예고도 없이 방향을 바꿀 때가 있다.
매일 오르던 산길도, 자전거가 다니던 흙길도, 손끝이 닿던 배춧잎도…
어느 날 문득, 다시 닿지 못하는 길이 되고 만다.
눈이 내린 뒤 산행길 곁으로 어르신네 배추만 하얗게 서 있다.
주인을 기다리듯, 마치 “언제쯤 오실까” 하는 표정처럼.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 돌보던 것들이, 어느 순간 우리를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그게 어쩌면 인생의 예기치 못한 장면이 아닐까.
부디 어르신이 다시 한번 그 밭을 걸어 내려오시길.
배추 대신 봄동이라도 몇 포기 뜯어가시며
“그래, 아직 볼 일이 남았지.”
하고 중얼거릴 수 있기를.
그리고 눈 덮인 밭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알았다.
우리가 남겨두고 간 자리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빛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