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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Oct 20. 2021

당신이 들어 줄 테니까

글쓰기의 매력의 빠져든 첫 순간을 기억하다



어쩌다 나는 글을 쓰게 된 걸까




글쓰기로 먹고산 지 십수 년. 어떤 주제가 던져져도 뚝딱 한 편을 써내는 건 쉬운 일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거창한 주제는 좀처럼 쉽지가 않다. 이건 뭐랄까. 내가 밥을 먹는 이유, 김치를 젓가락으로 집는 이유, 걸을 때 오른발과 왼발을 교차로 내딛는 이유를 설명하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란 얘기다. 멋지게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가득한데, 실상은 딱히 멋있을 게 없다. 솔직히 고백하면, 글쓰기란 멋지기는커녕 ‘찌질함’에 좀 더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은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 이유를 찾자면 처음을 떠올리게 되니까. 여느 초등학생이 그렇듯 나도 일기 쓰기, 독후감 쓰기와 같은 숙제를 통해 처음 글을 접했고, 우연히 깨달았다. 그 숙제들이 남들만큼 괴롭지 않다는 걸. 하기 싫은 정도는 아니었다는 거지, 처음부터 대단하게 글쓰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는 얘긴 아니다. 




내가 글쓰기의 매력을 처음 느낀 순간은 따로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을 것이다. 선생님이 내가 쓴 독후감을 칭찬하면서 낭송을 해 보라고 했다. 이 자체는 별로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전에도 수많은 글짓기 상을 받았고 글 좀 쓴다는 칭찬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글 쓰는 게 재미있어지진 않았다. 중요한 건 칭찬의 포인트였다.

당시 나는 상당한 독서량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골방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도 독후감 쓰기는 고역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당시 어린이들의 독후감은 대개 구성이 고정되어 있었는데, 줄거리 나열과 한 줄의 감상으로 정해진 분량을 채우곤 했다. 그게 너무 지루해서 나는 어느 순간 줄거리를 아예 안 쓰기 시작했다. 책 읽을 당시의 내 상황이라든지, 등장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의문, 반대 상황에 대한 상상 등등 쓸 거리는 무궁무진했으니까. 만약 담당 교사가 경직된 사고를 가진 선생님이었다면 ‘이건 독후감이 아니라 일기가 아니냐’고 할 법한 글이었다.

다행히 부임한 지 1년도 안 된 젊은 남교사에게는 내 독후감이 신선하게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얘들아, 독후감은 이렇게 쓰는 거야!”라고 감탄하듯이 칭찬하고는 굳이 나를 앞으로 불러내 읽게 시켰다.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내가 쓴 글을 읽었는데, 속마음은 그야말로 짜릿했다. 내 생각을, 내 얘기를 이 모든 아이들이 경청하고 있다니! 자발적인 행위는 아니었으나 그 아이들은 나의 첫 독자인 셈이었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이제 내가 왜 글쓰기를 ‘찌질함’에 가까운 행위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내 얘길 들어 주는 게 마냥 좋았던 어린아이의 마음, 그게 아직 내 안에 있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사람마다 낼 수 있는 볼륨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아버지가 10 정도 된다고 치면, 할머니는 9, 남자인 내 동생은 5, 엄마는 1, 나는 0.5 정도? 볼륨 자체가 다른데 대화가 가능할 리 없다. 그렇게 작은 볼륨으로는 당최 할 수 있는 게 없다. 용기를 내어 입을 열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아무리 있는 힘껏 소리쳐도 1도 안 되는 볼륨으로는 귓구멍도 간지럽힐 수 없다. 가끔씩 맘 좋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줄 때도 있었지만 그 선의에 기대어 살기에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나의 사적인 생각들을 그저 글로 풀어놓았을 뿐인데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들어 주었다. 그 경험은 나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아무에게도 관심 받지 못하던, 소극적이고 예쁠 것 없는 평범한 여자애가 처음으로 주인공이 된 순간. 그림을 잘 그리거나, 빠르게 달릴 수 있다거나, 노래를 잘 불렀다면 얘기가 좀 달라졌겠지만 천만다행으로(?) 나에게 글쓰기는 유일무이한 재능이었다.





한때는 커다란 포부를 갖고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기도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글쓰기는 거기에 없었다. 그걸로 아주 오래 자괴감을 느끼며 살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나는 글쓰기로 대단한 예술을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내게 글을 쓰는 건 목소리를 갖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숨죽여 살고 싶지 않다. 듣기 싫은 소음에 귀를 막거나 지레 움츠러들고 싶지도 않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해서 모두가 같은 볼륨으로 소리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는 페미니스트이기에 조금이라도 균형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렸을 때는 듣는 사람이 있어야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좀 달라졌다. 일단 목소리를 내야 사람들이 듣는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이렇게 저렇게 살아간다는 걸. 뉴스에 나오는 일들만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크고 우렁찬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고, 다른 목소리와 어우러져 화음을 만들고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도 있다. 바람이 있다면, 나처럼 아주 작은 볼륨을 가지고 태어난 여성 친구들이 좀 더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굳이 용기를 낼 필요도 없다. 당신이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우리들이 들어 줄 테니까.






글_홍아미

2W매거진 발행인, 여성들의 창작활동을 응원하는 1인 전자책 출판사 ‘아미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지금, 우리, 남미》, 《그래서 너에게로 갔어》, 《조금씩 천천히 페미니스트 되기》등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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