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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Oct 23. 2020

나의 아미가에게

이름에 대한 구구절절한 변명

남미를 여행할 때 스페인어를 처음 배웠다.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지인들이 대부분이라 음식을 제대로 주문하고 호텔을 잡으려면 간단한 스페인어 회화는 필수였다. 사전앱을 깔아놓고 필요한 단어를 바로바로 찾아서 썼는데, 그렇게 알게 된 단어는 별도의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졌다.

생존용으로 공부한 것과는 별개로 나는 스페인어를 꽤 좋아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새로운 세계는 덤으로 따라온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좋아했던 단어 몇 개는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데 나다(De Nada)’같은 단어가 있다. 별 거 아니야. 괜찮아. 천만에. 뭐 이정도의 뜻이라고 할까. 지구 반대편의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데 나다’ 한 마디면 모든 일들이 별 것 아니게 느껴지고 여유가 생겼으니까. 비엔(Bien, 좋다), 꼰수엘로(Consuelo, 위로), 바모스(Bamos, 가자)도 내가 참 좋아했던 단어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페인어는 ‘아미가(Amiga)’일 것이다.


라틴어 계통의 언어들은 명사, 동사, 전치사 할 것 없이 죄다 여성용, 남성용으로 나뉘어있는데, 성별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 법이 없는 한국어 이용자로서는 사실 좀 불편하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아미가’만큼은 달랐다. ‘친구’를 뜻하는 여성명사. 친구 가운데서도 여성만을 묶는 단어가 있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나는 이 단어가 너무나도 좋았다. 당시 나이가 다른 여성친구들과 여행하고 있었는데 한국어로는 우리들을 설명할 단어가 마땅치가 않았다. ‘아는 언니동생’? ‘전 직장동료’? ‘선후배’? 우리의 친밀감과 남다른 인연을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거나 구구절절 설명하느라 부대끼는 이름들이었다. 그냥 친구라고 하면 어떠냐 했더니 어린 친구 입장에선 손해 보는 기분인 듯했다. “언니랑 내가 무슨 친구야. 이 언니 어려보이고 싶나봐” 뭐 이런 거다.(아, 한국의 나이 서열 너무 싫다)

그러나 스페인어로는 ‘아미가’ 한마디로 너무도 명확하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래, 우리는 아미가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우리의 친밀감을 그 안에 차곡차곡 접어 넣을 수 있었다.




Somos amigas.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미가를 정확하게 대체할 만한 한국어가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생각해보니 나는 단어로서의 아미가뿐만 아니라 아미가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여자들의 우정은 늘 폄하되어 왔지만, 물론 남자들의 끈끈한 카르텔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연약한 면도 있지만, 나는 감히 ‘삶의 필수요소’라 정의한다. 남자친구나 남편은 선택일 수 있어도 아미가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의 필요충분조건인 것이다.

이를 일찌감치 깨달은 나는 남미에 다녀온 후 ‘아미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여성 친구들과 인연을 맺고 다양한 일들을 벌여나갔다. 여성 전용 작업실을 운영하기도 했고, 다양한 모임이나 이벤트를 주최하기도 했다. 여행 작가로서 책을 출간할 즈음부터는 아예 필명을 ‘홍아미’로 지어버렸다-공교롭게도 BTS의 팬클럽과 비슷해서 가끔은 오해를 받기도 한다. 여기서 ‘Army’가 아니라 ‘Ami’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어야겠다. 

이제는 유진이라는 흔하디흔한 본명보다 내가 스스로에게 지어준 ‘아미’라는 이름에 더 애착을 갖게 된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유진보다는 아미로 불리는 일이 더 잦아진 걸 보면, 아미가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사귄 친구가 그 이전에 사귄 친구보다 훨씬 많아진 것일지도(솔직히 고백하면 전에는 친구가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얼마 전, 친한 동생에게서 ‘언니 주변에 진짜 멋진 분들 많은 거 알아요?’라는 말을 듣고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한번쯤 ‘아미가’라는 이름을 쓰게 된 이유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최근에 시작한 여성들만을 위한 전자책 출판 사업과, 2W매거진 웹진 창간도 같은 맥락이다. 나에게 아미가는 단순히 친구를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이를 넘어선 우정, 동료애, 서로의 삶에 대한 지지와 응원 등을 담은 존재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미가가 되자. 



나는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여성혐오의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쩌다보니 내 삶의 방향이 그 이름대로 나아가는 듯하다. 

언젠가는 나 자신이 멋진 '아미가'가 되어 많은 이들이 찾는 날이 오길. 아마 당분간은 더 많은 아미가들을 만나기 위해 내가 먼저 계속 일을 벌여나가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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