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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Oct 18. 2021

마감이 필요한 삶

마감이 없으면 글 못쓰는 병에 걸린 불행한 작가들을 위하여


매달 20일경이 되면 2W매거진 메일함에는 수십 통의 원고가 쌓인다. 원고 모집 공지를 올리는 게 보통 5일 즈음이니 원고를 받는 기간이 무려 15일에 달하는데, 마지막 하루 동안 받는 원고가 앞서 14일에 걸쳐 받는 원고보다 배는 많다. 그 모든 원고가 2주에 걸쳐 써졌을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늘 자정까지만 원고 받습니다”라는 말에 부리나케 한글 창을 켜고 쓰기 시작한 이도 있을지 모른다. 


막판에 몰린 원고들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지어진다. 정해진 시간까지 원고를 쓰기 위해 바쁜 일상 속에서 얼마나 채찍질을 했을까. 혹 밤을 지새운 이들도 있을까. 어째서 글이란 여유로운 아침 햇살 속에서가 아니라 하루의 말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가늠하며 조급하게 쓰게 되는 걸까. 그렇다. 이건 결국 내 얘기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될 때까지 미루고 보는 게 타고난 내 성품이라는 건 인정하고 시작하겠다. 그러나 ‘마감’이라는 두 글자의 단어가 이렇게까지 내 삶을 휘두를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잡지계에 발을 들이기 이전엔 말이다. 


문창과 출신이 진출할 수 있는, 그리 많지 않은 직종 가운데서 ‘잡지 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대학교 4학년, 한 교양 수업에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취업은 늘 바늘구멍보다 더 좁았지만 그건 핑계였다. 게을러터진 나머지 학점 관리도 엉망에다가 그 흔한 토익점수도 없고, 설상가상 문학에도 뜻이 없는 암담한 취준생이었다. 멍하니 딴짓만 하던 그 수업에서 그날따라 교수님 말씀이 귀에 와 박힌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까.


“취업 안 된다고 남 탓만 하지 말란 말이야.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질 때만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해. 하다못해 나한테라도 와서 ‘인턴 자리 좀 소개시켜 주십쇼’ 부탁하면 혹시 알아? 우리 회사 인턴 자리라도 연결해줄지.”

그리고 나는, 정말 그렇게 했다. 그분은 마침 경향신문사 논설위원이었고 당신이 내뱉은 말이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인턴을 소개하겠다고 연락했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레이디경향> 인턴이 되었다. 지금은 폐간된 여성잡지지만 당시에는 꽤 인지도가 있는 월간지였다. 서울 정동에 위치한 경향신문사에 첫 출근하던 그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수선하면서도 늘 긴장감이 흐르던 편집부의 분위기, 천장에 닿을 듯 쌓여있는 수많은 자료와 책들, 엄청난 소품과 의상을 보따리장수처럼 이고 지고 스튜디오와 복도를 뛰던 에디터들과 어시스턴트들. 월초에는 보통 외부 취재를 나가 있기 때문에 늘 비어있었지만, 15일이 지날 즈음이면 모든 기자 선배들이 초췌한 안색으로 자리에 앉아 마감을 치러냈다. 낮에는 못다 한 취재를 마치고 저녁 무렵에야 들어와 동이 틀 때까지 원고를 잡고 있어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원고 독촉을 하는 디자인팀과 이미 며칠 밤을 새운 뒤라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에디터들의 기싸움은 빼놓을 수 없는 갈등 요소였다. 디자인이 어느 정도 나와 ‘교정 언니’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면 편집부 공간은 그야말로 전시와 다름이 없었다. 3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잡지의 낱장이 기자와 교정자와 편집장 사이를 빠르게 오가며 빨갛고 파랗게 물들어갔다. 

편집장은 수시로 배열표를 체크하며 여태 마감을 끝내지 못한 에디터들을 닦달했고, 표지 후보들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고 마지막까지 고심하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커피와 간식은 밤샘에 필수였고, 자리에서 틈틈이 쪽잠을 자다가 잠깐 샤워만 하러 집에 다녀오는 에디터도 있었다. 동시에 두드려대는 키보드 소리, 이따금씩 의견 차이로 오가는 고성, 차곡차곡 쌓이는 교정지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인쇄 시간을 앞두고 시작되는 카운트다운. 

마지막 필름이 넘어가는 순간, 이미 녹초가 되어버린 에디터들은 그때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에 너덜너덜해진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잡지사마다 다르지만 월간지들은 대부분 2~3일의 마감 휴가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기획회의, 취재, 원고, 마감……. 한 달을 주기로 무한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며칠 밤을 새우고 미칠 것 같은 각성 상태를 견뎌야 할 때는 ‘이러다 죽지’ 싶지만, 모든 원고를 넘기고 마감 휴가 동안 푹 쉬고 돌아오면 갓 인쇄된 매끈한 잡지가 선물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매끈한 촉감과 잉크 냄새, 냄비받침으로 쓰기에도 부담스러운 두께를 어루만지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져 왔다. 그 힘으로 다시 한 달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감은 산고와도 같아서 고통스러운 만큼의 결과물을 가져다줬다. 그 달콤한 고통의 중독성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몇 년 전, 서재에 쌓인 잡지들을 다섯 수레에 담아 쓰레기장에 갖다 버렸다. 십수 년 잡지 기자 생활을 하면서 만들어왔던 잡지들. 무거웠다. 그것은 수백 번의 마감과 수천 번의 밤샘이 응축된 무게였다. 내외부적인 이유로 오래 일했던 잡지 일에 학을 뗀 참이었다. 다시는 내 삶에 숨 막히는 마감의 일상이 찾아오는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다짐했는데. 

나는 지금 마감을 하고 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수십 명의 필진들에게 대가도 없이 ‘새로운 원고를 내놓으라’며 매달 마감을 종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마감 날짜에 맞춰 알을 낳듯 힘을 주어 글을 쓰는 사람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 달콤한 고통에 중독된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삶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마감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인정하면 편해진다. 다음 마감을 기다리는 설렘은 덤이다. 






글_홍아미

2W매거진 발행인, 여성들의 창작활동을 응원하는 1인 전자책 출판사 ‘아미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지금, 우리, 남미》, 《그래서 너에게로 갔어》, 《조금씩 천천히 페미니스트 되기》등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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