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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Sep 03. 2024

Day3/4 지칠 땐 쉬어가도 괜찮아

수비리에서 팜플로나까지 20km

Today’s route ★★★☆☆

수비리Zubiri  → 팜플로나Pamplona 20km 




전날 저녁 맥주를 마시고 잔 게 패착이었을까.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여자들만 있는 4인실이라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고 쾌적했는데 최악의 수면을 경험한 밤이었다. 속이 안 좋아 몇 번을 일어났다 누웠다 해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2층 침대가 움직여 아래층에서 같이 흔들릴 이를 모를 순례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반 수면 상태에 들었다 깼다 하며 그렇게 누워 있으니 온갖 고민과 걱정에 휩싸였다. 발에 생긴 물집은 어쩌지. 내일은 어디서 잘까.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하루 쉬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호텔을 예약할까. 3일 치 숙박비인데 괜찮을까. 걷기 시작한 지 고작 3일 만에 벌써 연박을 해도 될까. 속이 왜 이렇게 안 좋지….


그렇게 조금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어느덧 6시가 되었다. 컨디션은 별로 좋지 않았다. 잠도 거의 못 잤는데 하필 생리 기간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게는 몸이 안 좋다고 늦게까지 늑장 부릴 그럴 환경이 아니었다. 늦어도 7시에는 다들 나서는 분위기라 맘 편히 쉴 수도 없다. 나도 심기일전하고 출발. 빈속에 진통제를 한 알 먹고 일단 길을 나서기로 했다.




가다가 바가 보이면 바로 아침식사로 또르띠야를 먹어야지, 하는 작은 목표만이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어제는 그렇게 자주 등장하던 바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보이던지.

날씨는 어제보다도 흐리고 우울했다. 하지만 걷는 동안 걱정과 고민은 점차 사라졌다. 걷는 것밖에, 정해진 방향대로 나아가는 수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좋은 방법이 될 줄이야. 


날이 좀 궂어서 그렇지 길 자체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길이었다. 바가 없어서 그렇지 앉아서 쉴만한 쉼터도 많았다. 




중간에 비바람이 꽤 거세져서 처음으로 우비도 꺼내 입었다. 순례길을 위해 일부러 장만한 초경량 우비인데, 챙겨 입는 게 은근히 성가셨다. 비바람이 한차례 쏟아지다가 반짝 해가 나면 또 금세 더워지고 우비 안은 습기가 차서 굉장히 불편했다. 앞으로는 어지간한 폭우가 아니면 우비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윈디재킷은 금방 마르고, 배낭도 방수 재질이라 보슬비나 짧게 내리는 소나기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때는 몰랐지만, 순례길의 절반 이상을 비와 함께 하게 된다. 초반에는 이 생각대로 우비를 입지 않고도 충분했지만, 말미에는 우비를 입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비가 많이 와서 거의 젖은 채로 다녔다.)


7시쯤 출발했는데 결국 팜플로나 근처에 있는 도시까지 5시간 걸려 도착했고, 거기서 비로소 바를 찾아 들어갔다. 그토록 염원하던 또르띠야와 카페콘레체(밀크커피)를 먹을 수 있었다. 순례길에서 조금 벗어난 동네 바였는데 두 메뉴 다 해서 3유로밖에 안 됐다. 그 동네의 맛집인지 손님이 많았고, 바게트만 사가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나도 나설 때 바게트(하프, 0.8유로)를 하나 샀다. 



첫 또르띠아. 바게트빵과 함께 나온다.




이날 나는 결국 알베르게가 아닌 싱글룸 하나를 잡아 하루 쉬어가기로 했다. 컨디션을 좀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숙소는 레지덴시아 미니캠퍼스라는 레지던스형 싱글룸을 잡았다. 1박에 44유로로 부킹닷컴에서 예약했다. 유럽에서 욕실 달린 싱글룸이 이 정도 가격이면 꽤 괜찮은 편이지만, 순례자 마인드를 장착한 상태에선 너무 큰 사치를 부리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하지만 내 몸은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물집 때문에 발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찝찝하고 잠도 잘 못 자서 몽롱하고, 얼른 가서 씻고 자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숙소 도착을 30분가량 앞두고 휴대폰 배터리가 똑 떨어져 버렸다.(보조배터리가 있었지만 충전 케이블이 망가져 충전이 잘 되지 않았다). 구글 맵이 없으면 나는 미아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이미 6시간 정도 걸은 상태라 체력도 방전되기 일보직전이었던 데다 생전 처음 와본 낯선 동네다 보니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잘 안 되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현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친절한 현지인 부부를 만나 구원받았다. 말도 잘 안 통하고, 내 휴대폰 전원이 나간 상태임을 보고는 근처에 차가 있다며 태워다 주겠다고 한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건 상식이지만(특히 혼자 여행 중에) 순례길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땐 한 번쯤 행운에 기대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는 건 변명이고, 그때 정말 춥고 졸리고 배 아프고 배고프고 다리 아프고 피곤해서 조금 더 그렇게 길에서 헤맸으면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3시쯤 체크인을 했다. 아, 이토록 쾌적한 나만의 방이라니. 눈치 보고 짐 챙기지 않아도 되고 옷도 마음대로 갈아입어도 되고 나 혼자 쓰는 욕실엔 무려 욕조가 있다. 따뜻한 반신욕이라니,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걸까. 

양말을 벗어보니 물집은 그새 하나가 더 늘었다. 하…


내 발은 왜 이 모양일까. 생각하다가 정말 궁금해졌다. (앞으로 수없이 자신에게 하게 될 질문) 나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누구도 나에게 산티아고를 가라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조금 생각해 보다가 ‘아 모르겠다. 일단 자자’라는 결론으로.


끼니는 근처 슈퍼에서 먹을 것을 사 와 대충 때웠고, 일찌감치 반신욕 하고 누웠다. 그리고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11시간을 내리 자버렸다. 한 번도 깨지 않고. 그야말로 단잠이었다. 그리고 12시 체크아웃 시간까지 꽉 채워 뒹굴거리다 나와서 팜플로나 공립 알베르게 ‘지저스 이 마리아 호스텔’로 옮겼다. 

짐을 옮겨다 두고 동네 구경을 하며 쇼핑을 했다. 나름 시내라는 게 있는 큰 도시라 팜플로나에서 사야 할 게 많았다. 우선 약국에 가서 콤피드도 샀다. 그동안 다른 순례자들이 기부해 준(순례길 용어로 ‘Pilgram Provided’라 이른다고 훗날 누군가 얘기해 주었다. 당장 필요한 거라면 예의 차리겠다고 굳이 거절할 것 없이 고맙게 기꺼이 받고, 나도 도움이 필요한 다른 순례자들에게 제공해 주면 된다.) 콤피드로 임시처방을 했는데, 계속 물집이 생기는 걸 보니 나에겐 아주 많은 콤피드가 필요할 것 같았다. 혹시 몰라 다양한 사이즈가 들어있는 콤피드 박스를 샀는데(큰 거 2장, 중간 3장 작은 거 2장) 14유로나 했다. 이거 비싼 거였구나. 충전이 잘 안 되는 충전 케이블을 버리고 대체할 새로운 케이블도 샀는데, 큰 시내라 그런지 다이소 같은 매장이 있어서 고작 1유로면 구입할 수 있었다(도시가 좋다!) 슈퍼에서 생리대도 사고, 사과 1유로어치도 샀다. 남편에게 보낼 엽서도 사서 광장에 있는 유명한 카페(무려 헤밍웨이가 단골이었다는!)에 들어가 엽서를 썼다. 맛난 커피와 케이크도 즐겼다. 오래간만에 유유자적 쇼핑도 하고, 카페에서 글도 쓰고 시간을 보내는 이 평범한 시간이 매우 특별한 외유로 느껴지는 건 아마도 나에게도 슬슬 순례자의 영혼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리라. 





전날부터 거의 혼자 시간을 보냈는데 ‘지저스 이 마리아’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하자마자 너무나도 많은 한국인 순례자들에 둘러싸여 정신이 없었다. 14일에 출발해 나처럼 팜플로나에서 하루 연박한 순례자들과 15일에 출발해 수비리에서 바로 도착한 순례자들이 겹쳤기 때문이다. 생장에서부터 매일 같이 마주쳐서 친근해진 순례자들과 우리보다 하루 늦게 출발해 또 다른 경험을 하면서 걸어온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니 새로운 기운이 환기되는 느낌이 들었다. 


근처에 유명한 타파스 식당이 있다고 하여 라나와 함께 가우초레스토랑에 갔다. 라나는 나보다 훨씬 걸음이 빨라 같이 걷지를 못했다. 중간중간 바에서 만나거나 숙소를 잡은 뒤 같이 저녁을 먹곤 했다. 그렇게 둘이 수다를 떨다가 생장 숙소에서부터 계속 함께 걸었던 다른 순례자들과 합석해 여자 5명이서 아주 신나게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다 보니 30대~40대의 여자 5명이 모였는데, 내친김에 단톡방을 만들어 정보를 나누기로 했다. 


나름대로 멋진 휴식의 시간을 보냈던 팜플로나. 뭔가 좀 아니다 싶을 땐 잠시 멈춰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Jesus y Maria ★★☆☆☆

1박 11€ (특장점: 세탁기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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