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24km
Today’s route ★★★★☆
생장Saint-Jean-Pied-de-Port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나폴레옹 루트) 24km
새벽 6시에 일어나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대망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날. 까미노 프란세스(프랑스길)를 시작하는 여정의 첫날이다.
이른 새벽이라 캄캄했지만 은은하게 여명이 비쳤다. 전날, 순례자 사무실에서 일러준 대로 프랑스길 표식을 눈으로 찾으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직은 프랑스령의 까미노라 까미노 마크가 흰줄, 빨간줄이 나란히 그어진 표식으로 되어 있다. 가면 안 되는 곳은 흰줄, 빨간줄이 X자로 표시된다.
처음 걷기 시작할 땐 캄캄했는데 걷다 보니 뒤로 해가 뜨는 게 느껴졌다. 아마 앞으로 한 달 동안 내 등 뒤에서 솟아오른 태양이 정수리를 지나 정면에서 작열하다 저물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해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동에서 서로 걷는 길이이니까. 어쨌든 첫날인 이 순간만큼은 두근거리는 마음 반, 아름다운 마을을 걸으며 느끼는 황홀한 마음 반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문 연 마트나 상점 같은 것도 없는 평범한 마을과 시골길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많은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하고 아름다운 마을이 전혀 상업화되지 않았다는 게 참 신기했다. 기껏해야 순례자를 위해 마련된 자판기가 전부였다. 주변에 끝없는 초원뿐인데, 덩그러니 놓인 자판기가 뭔가 신기하게 보였다.
한 시간쯤 걷다 보니 길은 조금씩 오르막길로 변하며 산으로 이어졌다. 아침빛을 받아 대지가 생동하듯 깨어나기 시작했다.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는 피레네산맥을 배경으로 풀을 뜯고 있는 소와 말들. 이들을 비추는 눈부신 빛이 마치 신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계속해서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풍경에 나뿐만 아니라 많은 순례자들이 탄성을 지르며 자주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 출발한 우리가 참 날씨운이 좋았던 듯하다. 이날 피레네를 넘을 때는 구름이 거의 없는 쾌청한 날씨였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짙은 안개에 비바람까지 위험했다고 한다. 이 길을 일명 ‘나폴레옹 루트’라 하는데 매일 기상상황에 따라 급변하는 길이라 5월에도 조난사고가 있었고 6월에도 눈보라 치는 날이 있을 정도라 한다.
*나폴레옹 루트(Route Napoléon)란?
1815년 나폴레옹 1세가 추방된 엘바 섬으로부터 왕권을 되찾기 위해 파리로 돌아올 때 택한 루트라고 한다. 바스 프로방스에 주둔한 왕당파 군대를 피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기로 선택했고, 불과 2주 남짓 만에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200여 년 전, 나폴레옹이 왕권을 다시 찬탈하기 위해 이 산을 넘을 때 그때의 하늘은 어땠을까. 만약 오늘과 같았다면, 그는 신이 자기편이라는 확신에 걸음이 더 빨라졌을 것 같다. 반대였다면, 그는 제시간에 파리에 도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이 나폴레옹을 도왔던 게 맞네.
오늘의 신은 나의 순례길에 축복을 내려주고 있다. 그러나 감탄은 여기까지.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되고 세 시간이 되도록 계속되는 오르막길.
헉헉 숨차는 소리만 내 귓가에 가득하다. 극악하기로 소문난 피레네 나폴레옹 루트의 오아시스가 있다면 바로 12킬로 지점에 나타나는 오리손 산장이다.
딱 힘들 때 나타나니, 이보다 더 반가울 수 없다. 체력에 자신이 없는 이들은 여기서 하루 묵어가기도 한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예약에 실패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커피 한 잔 주문해 테라스에 앉아 전날 같은 숙소에서 묵었던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누며 잠시 대화를 나눴다.
나폴레옹 루트의 유일한 쉼터이기에 이곳에서 할 일이 많았다. 풍경도 감상하고(사진도 찍고), 한 칸뿐인 화장실도 짬 내어 이용하고, 전날 사둔 사과로 간단히 요기도 하고, 식수대에서 물도 가득 채우고, 참, 산장 앞에 식수대가 있는데, 물맛이 참 좋다. 출발할 때 물을 너무 많이 담아 오지 말고(무거우니깐), 여기서 한번 채워간다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자, 론세스바예스를 향하여 다시 출발. 이때 시간이 10시 반~11시 정도 되었을까. 3시간 이상 걸었는데 아직도 한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막막하게 느껴지는 시점이다. 눈부신 날씨에 저 멀리까지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실컷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은 참으로 감사하지만, 그늘 하나 없는 길이기에 이 눈부신 축복을 나의 정수리로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네다섯 시간쯤 지나니 슬슬 드러눕는 사람이 속출한다. 길을 안내하는 표식 외에는 벤치나 쉼터 같은 게 없어 어쩔 수가 없다. 결국 나도 나지막한 꽃밭 위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평생 도시인으로 살아온 한국인으로선 돗자리도 없이 맨바닥에 눕는 게 참 적응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여긴 순례길이니까. 내친김에 양말 벗어 고생한 발에 바람도 쐬어주고.
어느 시점부터는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가가 바뀐다. 선이라도 그어놨을 줄 알았건만 아무것도 없어 조금 허무했다. 걸어서 국경을 넘는 일, 아니 육로로 국경을 넘는 일은 반도 구석자리에 끼여 있는 한국인들에게 나름 색다른 경험인데 말이다.
중간에 몇 번이나 쉬면서 천천히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정점에 올랐다. 어느덧 오르막길이 끝나고 죽음의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신나게 성큼성큼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무릎보호대를 좀 더 조였다. 여기서 무릎을 다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다. 순례길 준비를 하며 오래 고민하다가 등산 스틱을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무릎 보호를 위해 스틱은 필수품이라고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무게감을 감당하면서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니 무릎보호대가 조금이나마 완충작용을 해주길 바라며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그늘 없는 무지막지한 오르막길과 가파른 내리막길로 인해 점점 체력이 고갈되어 가는 게 느껴지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니. 이게 현실인가.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7시간째 걷고 있는 중이라는 것뿐.
순례길 코스의 첫 시작으로 왜 나폴레옹 루트를 추천하는지 알겠다. 광활한 대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순례의 첫 시작을 여는 기분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이 안 된다. 스페인으로 넘어오면서 순례길 표식은 조가비 모양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실컷 보게 되겠지.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아침 7시에 출발했으니 약 8시간 만의 도착이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de Roncesvalles ★★★★☆
1박 14유로 (저녁식사 13유로, 아침식사 6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