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21km
Today’s route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 수비리Zubiri 21km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다. 시차적응이 잘 된 것인지 안 된 것인지 매일 새벽 네다섯 시면 눈이 절로 뜨였다. 아침식사 시간이 7시라 했으니 더 자도 되지 않나 싶어 침낭 속에서 좀 더 미적거렸다. 전날 8시간을 걷고 피곤해 10시도 안 되어 곯아떨어진 덕분에 컨디션은 가뿐했지만, 여기저기 근육통이 느껴졌다.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는 최근에 리모델링을 대대적으로 했다 하더니 시설이 거의 호텔급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고정형 맞춤식 이층침대라 흔들림이나 삐걱거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코골이 등 어쩔 수 없는 소음은 비행기에서 받은 귀마개로 커버할 수 있었다. 덕분에 참 잘 잤다.
어젯밤 저녁식사와 더불어 조식도 신청해 두었기에 미리 짐을 싸두고 7시 조식을 먹으러 바로 옆에 있는 호텔 론세스바에스로 갔다. 혼자 갔더니 전원 외국인인 8인 테이블에 배정되어, 아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메뉴는 빵과 햄치즈, 오렌지주스와 커피, 사과와 케이크까지. 천천히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고, 따로 챙긴 사과를 빼고는 남김없이 먹었다.
식사를 마치니 7시 반 정도 되었다. 이후 양치도 하고, 선크림도 바르고, 이렇게 저렇게 채비를 마치고 보니 어느덧 8시가 되어 있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날이 꽤 춥고 흐렸다. 비 소식이 있다 했지만, 구름과 안개가 많을 뿐 비가 오진 않았다. 오히려 덥지 않아 좋았다. 비라고 하기엔 억울한 안개비가 얼굴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전날 걸었던 코스처럼 장엄한 산의 능선과 아찔한 고도는 아니지만, 나지막한 오르막 내리막을 따라 작고 귀여운 마을을 만나는 재미가 있는 길이었다.
동화책 그림 속에 나올 법한 외나무다리를 건너 완만한 능선을 따라 총총총 걷기도 하고, 표식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면 마을도 만나고 숲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혼자 걷다가, 1시간쯤 걸었을까. 우연히 H님을 만났다. 전날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맞은편 침대에서 주무셨던 분이다. 첫날 걷자마자 엄지발가락에 큰 물집이 잡혀 내가 난감해하자 바늘을 라이터 불로 소독한 후 실에 꿰어 물 빼는 법을 알려주셨다. 나는 카카오톡 친추하는 법을 알려드렸다. 순례자들 간의 상부상조라고 할까. 우리 아버지 연배임에도 불구하고 친화력이 좋고, 등산 고수라 대화가 아주 재미있었다. 공무원 은퇴 후 한국의 100대 명산을 섭렵하셨다고 한다. 아내 분은 무릎이 아파 함께 오지 못했다고 한다. 1시간쯤 같이 걷다가 점점 물집 잡힌 발이 아파와 발도 쉴 겸 마침 만난 바에 들르겠노라 헤어졌다.
가게에 들어갔더니, 전날 숙소와 길 위에서 통성명했던 현석씨와 H가 있었다. 까미노는 혼자 가도 혼자 걷기 힘들 거라 하더니, 걷다가 쉬다가 아는 사람을 계속 만난다. 세 번 이상 우연히 만나면 더 이상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다. 이름까지 알게 되면 반갑기까지 하다. 외국인도 그런데 한국인은 더 그렇지.
오리손 산장을 제외하곤, 까미노 bar는 처음 이용해 보는 셈이었는데 또르띠아는 2유로 밀크커피는 1.5유로 정도로 아주 저렴했다. 또르띠야는 스페인 스타일의 오믈렛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앞으로 자주 먹게 될 음식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배가 그리 고프진 않아서 두 사람 것을 조금 맛만 봤는데 너무 맛있었다. ‘내일부터 내 아침식사는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잠시 쉬는 동안 양말을 벗었는데 발이 만신창이였다. 어제 하루 걸었을 뿐인데 벌써 이 지경이 되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엄지발가락에 꽤 큰 물집이 잡혔고 새끼발가락도 쓰라렸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물집이 생겼다고 했더니 외국인 순례자들이 ‘콤피드(Compeed)’가 있냐고 내게 물었다. 그게 뭐냐고, 없다고 했더니 기꺼이 자기 것을 하나 꺼내 주었다. 두 명이나 그랬다. 아마도 서양인 순례자들 사이에서는 필수 용품인 모양이었다. 물집을 터뜨리지 말고 그 위에 붙이기만 하면 며칠 뒤에 낫는다고 했다. 하나는 어제 붙였고, 또 하나 생긴 곳에 나머지 하나를 붙였다. ‘괜찮아. 이제부터 잘 관리하면 돼.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물집이 될 거야. 암.’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왠지 앞으로 내 돈 주고 이 콤피드라는 밴드를 자주 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실 수비리 가는 코스는 전체적으로 볼 때 꽤 수월했다. 전날 땡볕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오르막길을 걷던 코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적당히 흐린 날씨가 도와줘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비리 코스의 마지막 구간에서 그 생각을 바꿔야 했다. 자갈과 뾰족한 바위로 된 가파른 내리막길로 되어 있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발끝에 바늘이 찔리는 듯 너무 아팠다. 이렇게 아픈데 물집이든 찰과상이든 멍이든 안 생기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오늘의 알베르게
호스텔 리오아르가 Hostel RioArga ★★★☆☆
1박 17유로. 아침식사 불포함. 이불과 담요, 샤워젤 지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