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아무 목적도 없이 걷고 싶을 때가 있다.
‘어디 갈까?’보다 ‘어디로든’이 더 끌리는 날.
그날이 그랬다. 이정표도, 약속도 없는 도시의 오후.
익숙한 길을 일부러 피해 걷다 보니, 발끝이 데려간 곳은
한적한 골목이었다.
담벼락에는 이름 모를 덩굴이 피어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오래된 시계들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고장 난 시계는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그곳의 공기만은 멈춰 있는 듯했다.
누구도 나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안내문도 없는 장소.
나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풍경’을 마주했다.
우리는 늘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배워왔다.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지키고,
목표를 향해 움직여야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배운 적 없는 방식으로 길을 걸었다.
목적 없이 움직였고, 결과 없이 머물렀다.
그렇게 마주한 풍경은
어쩌면 내 마음속에서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곳이었다.
바람은 말없이 등을 밀어주었고,
햇살은 구김 없이 내려앉았다.
내가 하지 않은 계획 덕분에,
비로소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 만날 수 있었다.
우연히 만난 장소에서 얻은 건 풍경만이 아니었다.
예측하지 않은 순간에 더 깊은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
지도가 알려주지 않는 길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정류장이 있다는 확신.
그래서 나는 가끔,
일부러 길을 잃는다.
통제를 내려놓고,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는다.
그러면 뜻밖에도,
그 길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내가 진짜 바라던 ‘풍경’일 때가 많다.
계획 없는 하루가 마음을 가장 정확한 장소로 데려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