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앉던 날, 다시 걷기 시작한 이야기

by 코난의 서재

책상 위에 쌓인 문제집은 늘 그대로였다. 펜은 손에 쥐고 있었지만, 한 장 넘길 때마다 낯선 영어 단어들이 벽처럼 가로막았다. 사전을 찾아도 금세 지쳐 덮어버리고, 다시 펴고… 그러다 결국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때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안 되나 봐.”

그 무력한 순간이 오래 이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우연히 손에 들어온 얇은 영어 소설 한 권. ‘이 정도면 끝까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작은 불씨가 일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해보자고 다짐했다. 하루에 두 장만, 모르는 단어는 그냥 흘려보내자.

처음 며칠은 답답했다. 글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머리는 하얗게 비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단어는 여전히 모자랐는데,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공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낯선 거리의 풍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을 덮던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손끝이 떨렸고, 눈물이 핑 돌았다. 점수로 증명되지 않아도 좋았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끝까지 해낸 일이었으니까.

그때 깨달았다. 나는 언어를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낯선 단어가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걸.

아마 그래서 지금, 나는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길에서 작은 표지판을 읽고, 현지인과 몇 마디를 주고받을 때마다 그때의 떨림이 다시 살아난다. 이제는 중급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실력보다 더 소중한 건 그때부터 이어져 온 마음이다.
“조금 느려도 괜찮아. 끝까지 가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거야.”

한 권의 얇은 책이 내 삶을 바꿨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언어는 내게 또 다른 문을 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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