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검은빛 May 10. 2023

두 개의 소망 목록

작은 버킷 리스트와 작은 행복

지난 1월 종로의 짧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나는 오 년 만에 서울의 공기를 맛보며 대도시의 활기를 느꼈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 한복판의 거리, 넘쳐나는 사람들, 식사 후 걸어보는 청계천 길가.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생활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 느껴보는 것도 괜찮은 대도시 특히 서울의 활력... 나쁘지 않았다.

삼 개월의 짧은 프로젝트였고 아직 추위가 남아 있던 터라 맘껏 서울을 돌아보기는 부족했다. 프로젝트 막바지에 봄기운이 퍼지면 이곳저곳 둘러보리라 생각하며 두 가지 '소망 목록(버킷 리스트)'을 정했다.


하나는 일하는 곳에서 살짝 거리가 있어서 점심시간에 둘러보기는 좀 곤란한 '운현궁 가보기'였고, 또 하나는 '한강다리 건너기'였다.


대략 6년쯤 전 광화문 근처에 일할 무렵 뜬금없이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티비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보게 되는 한강의 장면들. 그런 장면의 느낌을 오롯이 가져보고 싶음이었을까, 어느 날 조금 일찍 퇴근을 하여 '마포대교 걸어서 건너기'에 도전했다. 서울사람 혹은 서울 어느 곳으로 일하러 다니는 사람이라면 전철이나 버스로 수시로 건너 다니는 것이 '한강다리' 일 텐데 정작 두 발로 걸어서 한강의 너비나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건너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마포대교는 광화문에서 접근하기가 제일 나은 듯하여 정했는데, 막상 가보니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슬픈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며 첫 대면한 것이 '밥은 먹었니?', '많이 힘들었구나' 등의 글귀였다. 얼마나 많은 좌절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슬픔을 남겨둔 채 한강에 몸을 맡겼을까 하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한... 그런 기억들.

육년 전 건너 본 마포대교


운현궁은 인사동을 훑고 지나 안국역 근처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거처로 예전에 몇 번 가봤는데, 경복궁이나 창덕궁 혹은 종묘처럼 큰 마음(?) 먹고 가지 않아도 되는... 그냥 점심 먹고 한 바퀴 돌아보아도 되는 조선의 역사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역사를 역사답게 가르친다고 자부'하는 유투버 '황현필 선생'에 의해 조선시대 최고의 인물 2명인가 3명에 선정된 '흥선대원군 이하응'. 조선말기 그의 포부와 좌절, 명성황후와의 갈등... 이런 것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알고 있는 지식의 조각들을 떠올려 보기에 적절한 장소 중 하나가 '운현궁'이 아닐까 싶었다. 뭐 아무 생각 없이 운현궁 정경만 둘러볼 수도 있을 것이고.

운현궁의 꽃(얘가 무슨 꽃이더라@_@)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였다는 운현궁 노안당(老安堂)

이런 작은 목표를 정해둔 채 짧은 삼 개월짜리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중... '막바지에 여유로워질 것'이라던 당초 얘기와는 달리 갈수록 정신없어지고, 야근과 야근 그리고 주말 재택근무로 이어지는 탓에 '소망 목록(버킷 리스트)'는 물 건너가는구나... 하게 되었다. 사실 막바지에 여유로운 IT프로젝트는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온 힘을 다해야 될 것 같던 프로젝트의 마지막 날이 되었고, 요즘 불경기 탓에 다음 프로젝트로 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자의 아닌 휴가가 시작되었다.


'그래 지금이야! 한강다리도 건너고 운현궁도 가보자'


소망목록이 유통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먼저 을지로에 일이 있어 들렀다가 인사동에서 점심을 먹고, 발길을 향한 '운현궁'은 그야말로 소망목록 달성의 '껌'이었다. 백여 년 전 흥선의 고뇌는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 속에서나 다가오고, 그 새 따가워진 햇살에 풍성한 초록빛과 꽃구경으로 첫 번째 소망을 만족스럽게 달성하게 되었다.


그다음 날을 잡아 '한강다리 건너기'에 도전하였는데, 총 32개의 한강다리 중 서울에 속해 있다는 28개 중 어느 다리를 건널까 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마포대교는 한번 건너봤으니 제외하고, 건너면서 여의도가 보이고 국회의사당 돔 지붕에서 로보트 태권브이(넘 Old한가? ㅠ)가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생각하다가 '양화대교'를 선택했다. 예전에 한번 가본 선유도 공원의 기억도 좋았고, 여의도 쪽 전망이 괜찮을 거 같은 생각에. 하지만 막상 대교를 건너기 시작하자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한강 너비가 주는 '작은 바다' 같은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호선 철교가 지나는 바람에 여의도와 국회의사당 전망이 가려져서 로보트 태권브이가 나타나기 어려워 보였다. 차라리 서강대교를 건넜어야 했나? 싶었다. 또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마포대교를 건널 때 '밥은 먹었...' 따위의 시선을 끄는 어떤 것도 없었다. 그냥 바람 부는 긴 다리를 건너갈 뿐. ㅋ

양화대교에서 바라본 한강


이렇게 연초에 가졌던 작은 '소망 목록' 두 가지를 달성하고 나니 뭔가 작게나마 이룬 듯하고 살짝 기분도 나아졌다. 평소에도 소위 '목표'니 '소망목록'이니 따위를 세우거나 가지면서 뭔가 '이뤄가는 느낌'을 쌓아가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되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자! 이제 다음 '소망 목록'을 뭘로 하지?
아니... 내일은 또 내일의 소망 목록이 떠오를거야 ~! ㅋ

작가의 이전글 우린 얼마나 우리 것을 지켰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