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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코드 Apr 19. 2024

헷갈리지 말자.

번영의 약속과 대운의 속살


번영

금전적인 손해든 정신적인 고충이든 그런 것들로 당신이 휘둘릴 일 없다. 당신에겐 번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자의 권리에 관한 성경의 비가역적 확약이다. 전제조건은 있다.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밑그림을 토대로 당신은 장래를 장밋빛으로 바라볼 수 있다. 실현의 시기는 기약이 없다. 함정이다. 언제 어떤 모양으로 약속이 성취될지도 알 수 없다. 마냥 기다리다가 볼짱 다 볼 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아브라함이 아니다. 당시 브라함이 어떤 심경에 빠졌는지, 어떻게 심경 변화를 극복했는지 성경을 통해선 속속들이 알 수 없다. 현실은 대부분 안갯속이다. 사정은 추론했을 뿐이다.



대운

친구를 잃고 돈을 잃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면 앞으로 운세가 크게 트일 징조라고 말한다. 모든 게 무너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 같아서  안도감을 가지는지 모르겠다. 혹 모를 일이라 생각에 마음을 다잡는 계기를 거기서 얻을 수도 있다. 시련이 닥친 이유가 있었구나! 아직 끝이 아니야!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근거 없는 확신은 위험하다. 단계적으로 쌓아 올려야 계단 전체가 면모를 드러낸다. 건너뛰어서는 모를 갖출 수 없다. 토대를 쌓고 과정을 거쳐 성과를 얻는 과정을 훌쩍 뛰어넘는 이로운 조치이라니. 그런 것 없다. 로또 최고액 당첨은 내가 아니며 여타 복권에서도 나는 예외였다. 왜인 줄 아는가. 바랄 수 없는 요행이기 때문이다. 



요행의 뜻은 뜻 밖에 얻은 행운이다. 말뜻 그대로 이례적이라는 얘기다. 전부 잃었는데 부단히 애써야 할 도약의 시기를 건너뛰어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성과를 손에 쥐는 경우란, 글쎄다. 과연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여지없이 드러날 허점에 불구하고 혹하는 이유가 있다. 익히 아는 바다. 우린 근거 없는 낙관에 기대서라도 당장의 곤란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워낙 강하다는 것, 인정한다. 



다 잃었으니 이제 채울 일만 남았다는 말에는 얼마간 수긍한다.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해나가면 못할 것 없다.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늦겠지만 상관없다. 타인과의 비교나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제 일을 하면 된다. 중간중간에 뭉근하게 솟는 자괴감은 어떻게든 극복하면 된다. 부 잃었으니 상상할 수 없는 운이 따를 거라고? 생각을 곧추세워야 할 시기에 대책 없는 낙관은 독약이다. 그런 낙관은 뼛속까지 썩게 만든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걸 발견하는 절명의 고통을 굳이 맛볼 필요가 없다.





관성

출근길에 반드시는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 아파트 단지를 거칠 때가 있다. 단지를 거의 빠져나와 도로를 횡단하기 직전에 불법 주정차를 막으려는 줄에 발이 걸렸다. 그제야 선연하게  늘어선 줄이 드러났다. 못 봤을 리 없는데 그냥 지나친 모양이었다. 줄이 드리웠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뇌는 시각 정보를 받아들여 해당 정보를 해석한다고 알려져 있다. 엄밀히 따지면 뇌가 해석한 것을 보는 것이다. 이 경우 과연 본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시각에는 맹점이 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뇌가 해석으로 대신 채워 넣을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뇌와 눈의 은밀한 공조라 할만하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고 바로 그 부분을 정작 뇌가 전문용어(?)로 '캄프라치' 해주니 얼마나 알흠다운 관계랴.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시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가 아니라 뇌가 해석한 정보다. 뇌가 해석한 것을 '본다'라고 하기가 어색하다. 우린 우리에게 손해나 위협이 가해지지 않으면 어떤 행위나 상황이 석연치 않아도 대수롭잖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대수롭잖게 여긴다고 큰 탈이 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의 한계를 뇌가 보정하고 뇌가 보정한 정보를 시각이 딱히 반발하지 않는(?) 관계라면 정답게 봐줘도 무방할 듯싶다. 오늘처럼 뇌가 해석한 정보만 믿다가 덜컥 줄에 걸려 넘어질 위험성은 있지만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돈 잃고 친구도 잃는 상황에 견주면 사실 별 일도 아니다.



이제 쫄딱 망했으니 성공할 일만 남았다는 말은 외견상 틀린 말이 아니지만 사태의 원인을 따지고 회복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냉정하게 계산할 시기에 사태를 낙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은 사람을 헛된 운에 자신을 맡기려는 성향이 농후한 사람에게 입바른 소리가 되기 쉽다.  대체로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불행이 닥치면 속히 거기서 빠져나오려는 유혹에 더 강하게 뿌리내리는데 정상적인 셈을 피해 달아나면서도 그렇지 않다는 변명을 하기에 그 말만큼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대운이 쫄딱 망한 뒤에나 깃드는 것이라면 성실하게 노력한 뒤에 얻는 보상의 가치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방을 부추기는 사회는 위험하다. 부도덕이 도덕을 비꼬고, 이상이 정상을 대체하는 사회가 언제까지 온전하리라 기대할까. 몇 사람을 잠시 혹은 한동안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섣부른 위로에 속을 만큼 우린 한가하지 않.



미래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밑그림 위에 드러날 본그림은 확연히 다를 수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다만, 선택은 자유지만 책임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 그것만은 바뀌지 않는다. 그 뒤에 오는 미래는 서둘러 오지도 너무 지체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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