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뇌를 잃고 나서야 발견한, 더 넓은 나
“나의 뇌가 기능을 멈췄다. 하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 질 볼트 테일러는 신경해부학자였다. 뇌의 구조와 기능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연구하던 그 뇌가 무너졌다. 37세의 나이에 찾아온 좌뇌 출혈로, 그녀는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자신의 뇌가 어떻게 고장 나고 있는지를 '지켜본'다. 그것은 곧 자아의 해체를 지켜보는 경험이기도 했다.
우리는 보통 뇌를 잃으면 자신도 사라질 거라 믿는다. 기억이 지워지고, 언어가 사라지고, 의식이 흐려지면 더 이상 내가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있었다”고. 그녀는 점점 말이 느려지고, 숫자를 인식할 수 없게 되고, 주변 세계와의 경계가 사라지는 그 와중에도 고요한 기쁨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무엇이 남은 것일까? 질 볼트 테일러는 좌뇌가 멈추자, 우뇌의 세계가 열렸다고 말한다. 좌뇌는 분리하고, 구분하고, 해석하고, 시간과 서사를 만든다. 반면 우뇌는 지금-여기, 연결감, 감각, 그리고 존재 그 자체를 느끼는 부분이다. 뇌졸중 이후 그녀는 시간도, 이름도, 자신의 과거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존재하는 기쁨, 평화, 무경계의 감각을 더 또렷하게 경험한다.
감각의 문이 열릴 때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그녀가 세면대 앞에 서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좌뇌가 기능을 멈추면서, 평소라면 당연하게 여겼을 손이 더 이상 내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손은 더 이상 ‘소유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주와 연결된 하나의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내 손가락 끝에서 우주의 에너지장을 느꼈다.”
이 대목은 과장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 지나치게 좌뇌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그녀가 경험한 ‘우뇌적 자각’이 얼마나 결핍되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너무 자주 분석하고, 판단하고, 구분하느라, 존재하는 것 자체의 신비를 잃어버린다. 우리는 손을 보면서도 그것이 ‘내 것’이라는 개념으로만 인식하지, 그 형체나 움직임의 경이로움을 체험하지 않는다.
이 책은 마치 그런 감각의 문을 한 번에 활짝 열어버리는 경험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어디까지를 포함하는가. 생각이 멈춘다고 해서, 정말로 내가 사라지는 걸까? 이런 질문을, 단지 개념이 아닌 몸과 의식의 경계에서 실제로 겪은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 경험은, 독자에게도 고요한 충격을 안겨준다.
선택 가능한 자아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8년에 걸쳐 서서히 회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이다. 좌뇌 기능이 차츰 회복되면서, 언어 능력, 시간 감각, 기억 등이 돌아오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원래대로 회복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 기억이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기에 굳이 되살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회복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철학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대체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정보’와 ‘해로운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유지하고 있는가? 과거의 상처,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 불안한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 좌뇌는 멈추지 않고 재생하고, 반복하고, 흠집을 다시 들춰내며 우리의 현재를 오염시킨다. 질은 말한다.
“만약 다시 내 뇌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사랑과 평화를 기억하는 회로를 더 자주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자아란 고정된 어떤 것이라고 믿지만, 이 책은 자아는 선택할 수 있는 패턴의 총합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즉, 내가 자주 쓰는 회로가 곧 나의 성격이 되고, 나의 삶이 된다. 그렇다면 나도 이제부터 ‘비난’이나 ‘불안’ 회로보다는, ‘감사’와 ‘평온’의 회로를 더 많이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사라진 자리에서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좌뇌의 목소리’에 시달리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해야 할 일, 나의 위치, 타인과의 비교, 과거의 실수, 미래에 대한 걱정, 억울함, 자기 정당화… 그것들은 모두 생각이고 말이며 서사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잠시 사라졌을 때, 오히려 더 풍요로운 평화가 찾아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질 볼트 테일러는 뇌졸중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그 진실을 체험했다. 우리는 그 정도까지 가지 않아도, 명상, 예술, 자연과의 접속, 그리고 책이라는 통로를 통해 일상의 회로를 잠시 벗어나볼 수 있다.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다시 만나는 찰나일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만약 당신이 요즘 너무 많은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면, 또는 자아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진다면, 이 책을 펼쳐보기를 권한다. 과학자의 눈으로 쓴 회고록이지만, 그 안엔 신비와 철학,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가 함께 담겨 있다. 당신은 이 책에서, 스스로에게 묻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지금 내 안의 어떤 회로가 켜져 있는가?”
“나는 지금, 나의 어느 쪽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질문 하나만으로도, 삶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