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듣는 법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과 《다정한 서술자》를 함께 읽다

by 안녕 콩코드

차갑고 부드러운 두 목소리

책 두 권을 나란히 펼쳤다.

한 권은 차갑다. 날카로운 데이터와 도표, 차분하지만 직설적인 문장이 이어진다. 마이클 셀런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환경운동 내부에서 오랫동안 ‘의심하지 않는 진리’로 여겨진 명제를 정면으로 겨눈다. 과거 환경운동가였던 그는 내부에서 관찰한 자기모순과 이념적 폐쇄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풍력과 태양광이 무조건 옳다는 믿음, 원자력의 잠재력을 묵살하는 관행, 정치적 구호가 과학적 사실을 덮어버리는 현실을, 촘촘한 자료와 실증적 사례로 해부한다.


다른 한 권은 부드럽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는 여러 화자가 모여 부르는 합창처럼 느껴진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 사물, 시간, 장소가 자신의 시각으로 세계를 전한다. 소설 같기도, 철학 산문 같기도, 민속 설화 같기도 한 이 이야기들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슬며시 밀어내며, 존재들의 평등한 자리 배치를 상상하게 한다.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결의 책이다. 하나는 논쟁과 반박을 부르는 공적 발언이고, 다른 하나는 은유와 이미지로 사유를 흔드는 문학적 실험이다. 그러나 함께 읽으면 둘은 한 가지 메시지에서 만난다.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의심하라.”

이 의심은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다.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나아가는 시작점이며, 우리가 알던 사고의 경계를 넘어서는 길목이다.


믿음을 의심하는 용기

우리는 ‘좋은 의도’를 자동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환경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같은 단어는 질문을 던지기보다 곧바로 동의를 끌어낸다. 셀런버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환경운동 내부에서 활동하며, 그 이면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직접 목격했다. 예컨대, 태양광·풍력 확대가 기술적 한계와 경제적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선함’이라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추진되는 사례, 석탄 감축을 목표로 한 정책이 오히려 화석연료 의존도를 높이는 아이러니 등을 세밀하게 짚어낸다.


토카르추크는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선다. 그녀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믿음을 의심한다. 우리는 이를 너무 오래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고, 인간 외 존재가 어떠한 관점을 가질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녀는 숲 속 나무들의 시간 감각, 계절의 숨결, 벌레들의 소리를 서사의 주체로 세우며, 독자를 낯선 시각 속으로 안내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곧 다층적 세계가 열리는 매혹을 경험한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선하게 믿어온 명제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때로는 그것이 불편한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은 단순한 회의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문이며, 더 넓고 깊은 사고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인간 중심주의의 그림자

셀런버거는 선진국 환경정책의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탄소 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값싼 에너지원 접근을 제한하는 규제가, 개발도상국의 산업 성장과 생활 전력 확보를 막는 현실을 드러낸다. 예컨대, 어떤 아프리카 국가는 값싼 석탄발전소를 건설하려 했지만, 국제 금융기관의 압박으로 좌절했다. 대신 도입한 고가의 재생에너지 설비는 전력망의 불안정으로 이어져, 병원과 학교가 정전으로 마비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토카르추크의 시선은 다르다. 그녀는 서사 속에서 인간을 하나의 ‘등장인물’로 축소한다. 한 장면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배경이라 여겼던 풍경과 대화를 나눈다. 바람이 기분을 전하고, 강은 오래전부터 기억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공간을 공유하는 ‘이웃’이 된다.


결국 두 책이 보여주는 그림자는 같다. 인간 중심의 사고와 제도가 다른 존재들의 삶을 희생시키며, 그 결과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셀런버거는 국제 정치와 경제의 언어로, 토카르추크는 상상과 서사의 언어로 이 현실을 드러낸다.


서사의 힘과 위험

서사는 행동을 만든다. 환경운동에서 흔히 쓰이는 ‘멸망 서사’—빙하가 녹아 사라지는 북극곰, 해수면 상승으로 잠기는 도시—는 대중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한다. 하지만 셀런버거는 경고한다. 이러한 서사가 과학적 불확실성을 무시한 채 감정에 호소하면, 정책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지나친 공포는 복합적인 해법을 가로막고, 단선적 대책만 남기 때문이다.


반대로 토카르추크는 서사의 힘을 ‘위험’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역에서 바라본다. 그녀는 직선적 시간 구조, 단일 주인공, 인간 중심 시점 같은 기존 서사 규칙을 해체한다. 그렇게 풀어놓은 서사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다른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게 하며, 세계를 다층적이고 다각도로 경험하게 한다.


두 책이 결론은 달라도, 전제는 같다. 서사는 세계를 구성하는 틀이라는 점이다. 그 틀을 의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데이터와 감각의 협주

셀런버거는 철저히 데이터에 의존한다. 특정 재생에너지 설비의 에너지 수율(EROI), 전력망 안정성 지표, 원자력 발전소 사고율 통계 등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그는 ‘느낌’이 아니라 ‘증거’로 독자를 설득하려 한다.


반대로 토카르추크는 문장의 끝에서 감각과 이미지를 쌓아 올린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 늦여름 풀잎 위의 이슬, 고양이 눈동자에 비친 방의 풍경 같은 세밀한 장면들은 인간 중심 시선을 넘어선 세계를 직조한다.


이 두 접근은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한다. 데이터는 현실의 큰 구조를 보여주고, 감각은 그 구조 속 세부의 질감을 드러낸다. 두 방식을 함께 읽을 때, 독자는 ‘숫자로 이해한 세계’를 ‘감각으로 체득한 세계’와 겹쳐 경험하게 된다.


변화의 조건

셀런버거가 제시하는 변화는 기술과 정책 중심이다. 에너지 인프라를 재구성하고, 원자력 발전의 역할을 재평가하며, 탄소 감축 목표를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그는 정치적 명분보다 기술적 실효성을 우선시한다.


반면 토카르추크가 말하는 변화는 내적·인식적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언어의 습관, 이야기의 구조를 바꾸는 것. 인간만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넘어, 우리는 다른 존재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감각을 배운다.


외적 변화와 내적 변화는 함께 가야 한다. 제도만 바뀌면 사람의 사고가 따라오지 못하고, 사고만 바뀌면 제도가 뒷받침하지 못한다. 두 책을 함께 읽으면, 변화가 작동하는 이 이중 구조가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볼 수 있다.


불편함을 견디는 읽기

불편함은 성장의 신호다. 셀런버거의 주장은 환경운동 진영에 몸담은 독자에게 도발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토카르추크의 실험적 서사는, 익숙한 플롯과 서사 구조에 길든 독자에게는 당황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불편함이 바로 사고를 확장하는 문턱이다. 두 책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독자의 사고와 감각을 흔든다. 하나는 논리와 데이터로, 다른 하나는 은유와 서사로, 독자를 익숙함의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관점을 경험하고, 더 넓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교차 독서의 시너지

두 책을 함께 읽는 경험은 마치 ‘왕복 여행’과 같다. 셀런버거의 데이터를 따라가다 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토카르추크의 서사로 돌아오면, 그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왕복은 독자에게 한 가지 중요한 기술을 가르친다.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듣는 법이다. 논리로 말하는 이를 서사의 귀로 듣고, 서사로 말하는 이를 논리의 귀로 듣는 훈련이다. 이 기술은 환경, 정치, 사회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유효하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 준다.


이후의 독서로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과 《다정한 서술자》의 만남은 의외이지만, 매우 생산적이다. 하나는 우리가 믿어온 ‘사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다른 하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습관을 바꾼다. 두 시선이 교차할 때, 독자는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다.


이 경험은 다른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다. 경제학 서적과 시집, 과학 보고서와 역사 소설, 정치 비평과 여행기를 짝지어 읽는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와 사고가 부딪히고 어우러질 때, 우리는 한쪽 시선만으로는 볼 수 없었던 세계를 새롭게 마주하게 된다.




부록 –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1. 셀런버거의 장면들 – ‘도표와 인간 사이’

① 아프리카 전력회의의 한 순간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국제 회의장 안에서 공기조차 정전처럼 무겁다. 연단 위에는 ‘탄소 중립’이라는 표어가 번쩍인다. 마이클 셀런버거는 청중 사이에 앉아, 마이크 앞의 한 장관을 지켜본다. 장관은 담담히, 그러나 씁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순합니다. 안정적인 전기입니다. 병원이 멈추지 않게, 아이들이 밤에도 공부할 수 있게. 그런데 국제 기금은 우리에게 석탄발전소 건설 자금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값비싼 태양광 패널을 사라 합니다. 낮에는 전기가 들어오지만, 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셀런버거는 손에 쥔 회의 자료의 수치를 다시 본다. 재생에너지 확대율 그래프는 가파르게 오르지만, 전력망 안정성 지수는 떨어지고 있다. 그는 그 순간, ‘선의’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 모순을 숨길 수 있는지 깨닫는다.


② 원자력 발전소의 냉각탑 아래서

회색 하늘 아래, 증기가 길게 뿜어 오른다. 셀런버거는 노트북을 꺼내 사고율 통계를 불러온다. 원자력 발전의 치명적 사고 확률은 석탄, 석유, 심지어 수력보다도 낮다. 그러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다. 데이터와 감정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깊은지, 그는 그 간극을 메우는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토카르추크의 장면들 – ‘다정한 시선의 실험’

① 강이 말하는 저녁

늦여름 저녁, 강둑의 풀잎이 이슬을 품고 있다. 서사는 인간 화자를 버리고, 강이 직접 말을 건넨다.

“나는 오래전부터 여기를 흐르고 있었지. 사람들은 나를 배경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들의 이야기보다 오래 살아왔다. 네가 부는 바람의 소리를 기억하듯, 나는 네가 흘린 눈물을 기억한다.”

독자는 갑자기, 자신이 바라보던 세상의 중심축이 옆으로 밀려난 듯한 어지럼증을 느낀다.


② 도서관에 모인 모든 이야기들

어느 장에서는 거대한 도서관이 등장한다. 책들은 하나하나, 자신이 품은 이야기를 속삭인다. 전쟁을 기록한 책이 평화를 이야기하고, 한 나무의 일생을 기록한 책이 인간의 생로병사를 위로한다. 여기서 책은 물건이 아니라 ‘서술자’이며, 인간의 목소리만큼이나 분명하고 중요한 존재다.


3. 교차 독서로 재구성한 ‘공명 장면’

이제 셀런버거의 회의장과 토카르추크의 강이 같은 페이지에 놓인다.

회의장의 장관이 말하는 “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강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밤이 되면 전기가 사라지는 마을, 어둠 속의 강이 말한다.

“나는 여전히 흐르고 있지만,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는구나. 너희가 보는 건 패널의 수치와 목표치뿐.”


원자력 발전소 냉각탑의 흰 증기와, 도서관 책들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겹친다. 하나는 기술과 안전을 설명하는 데이터의 연기, 다른 하나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내뿜는 숨결이다. 둘 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려 한다.


4. 부록의 의도

이 장면 재구성은 두 책의 사상을 ‘논지’가 아니라 ‘공기’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셀런버거는 현실의 구조를 직시하게 만들고, 토카르추크는 그 구조의 감각을 확장시킨다.

둘 사이를 오가며 읽는 독자는, “이것이 옳다”라는 확신보다 “이건 다시 봐야겠다”라는 섬세한 감각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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