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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의 변주: 미묘함과 충만의 경계에서

by 콩코드


​사르트르의 틈새, 오후 세 시의 빛깔

​오후 세 시. 이 시간만큼 미묘하고 어정쩡한 순간이 있을까요?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이 시간을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고 끝내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정의했습니다. 마치 시간의 틈새에 낀 것처럼, 전진도 후퇴도 애매한 이 순간에 그는 실존의 권태를 포착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그 미묘한 정의를 잠시 비틀어보면, 오후 세 시는 역설적으로 가장 주관적인 '여백'의 시간이 됩니다. 아침의 격렬한 다짐과 오전의 분주함은 이미 지나갔고, 저녁의 약속이나 귀가 시간의 압박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시간의 무게가 잠시 가벼워지는 순간, 이 느슨함 속에서 우리는 각자 다른 빛깔의 오후 세 시를 맞이합니다.


​이 시간은 카페에서 즐기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같습니다. 지나치게 뜨겁지도, 완전히 식지도 않아 가장 완벽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오후 세 시는 '충만과 침잠'이 공존하는 마법의 시간입니다. 이미 하루의 일정을 계획대로 시작한 이에게는 노곤한 피로와 함께 편안한 저녁을 꿈꾸는 '보상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반면, 늦게 출발했거나 내일을 기약하는 이에게는 침잠 속에서 새로운 도약의 가능성을 품는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하죠.



​문학의 조명 아래, 경계를 걷는 시간

​오후 세 시의 이 미묘한 경계는 문학 속에서 더욱 깊은 사유의 공간이 됩니다. 낮과 밤, 현실과 꿈, 행동과 관조의 경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오후 세 시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글쓰기 공간이 떠오릅니다.


​울프의 문학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일상 속 찰나의 순간들이 얼마나 깊고 무한한 사색을 담고 있는지 탐구합니다. 그녀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하루를 관통하며 느끼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의 파도는 오후의 햇살 아래 더욱 증폭됩니다. 오전의 사교적인 의무를 끝낸 후,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이 느슨한 오후는 내면의 목소리가 가장 명료하게 들리는 시간입니다.


​오후 세 시는 바로 그 내면의 클라리사가 바깥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존재와 감정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 아래, 커피 향을 맡으며 잠시 멈춰 서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순간. 사르트르에게는 권태였을지 모르지만, 울프에게는 창조적 영감이 솟아나는 침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어정쩡한 오후, 충만한 고독

​오후 세 시의 어정쩡함은 사실 '고독의 축복'입니다. 이 시간은 대개 타인과의 약속보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 우선시될 수 있는 시간이죠.

​완벽한 타이밍의 부재: 이 시간은 점심 식사처럼 의무적이지도 않고, 저녁 식사처럼 화려한 기대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사라진 자리, 그 빈 시간에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낮잠의 유혹과 저항: 춘곤증처럼 찾아오는 오후 세 시의 나른함은 우리를 잠시 낮잠의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그 유혹에 저항하고 깨어 있을 때, 우리는 삶에 대한 가장 깊은 집중력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의무가 아닌, 선택에 의해 얻어낸 귀한 집중력입니다.


​이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은 아마도 '미리 시작한 사람'일 것입니다. 오전에 해야 할 일을 끝낸 이에게 오후 세 시는 일종의 정서적 보상입니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제 곧 다가올 평온한 저녁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리죠. 그들에게 오후 세 시는 '노력의 결실을 조용히 누리는 시간'이며, 이는 곧 내일을 준비하는 침잠과 도약의 가능성을 품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의 오후 세 시, 다시 흐르는 시간

​오후 세 시의 마법은 그 시간이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완성됩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곧 황혼이 찾아오고, 하루는 종결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미묘한 시간이라고 외면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 틈을 붙잡고 사색의 붓을 들었습니다.


​따뜻한 커피가 식기 전에, 우리는 이 시간의 여백 속에서 멈춰 섰던 내면의 시계를 다시 움직일 동력을 얻습니다. 우리의 오후 세 시는 사르트르가 느꼈던 권태 대신, 울프가 발견했던 존재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 오릅니다.


​이제 곧 커피 잔을 비우고 다시 일어서야 할 시간입니다. 하지만 이 짧은 오후 세 시의 틈이,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을 새롭게 맞이할 힘을 주었음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오후 세 시는 지금 어떤 빛깔인가요? 그 따뜻함 속에서 당신만의 충만한 의미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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