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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꿈, 실재와 실제

세계를 인식하는 또 다른 단서

by 콩코드


요즘은 세계사적 의의라는 무언가 웅장한 개념을 따지는 분위기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만큼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는 증좌일 겁니다. 아니라면 그깟 거대담론이 사회에 기여한 게 뭐 있어?, 하고 냉담한 시선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실천에 취약해,라고 알은체를 하기도 할 겁니다. 뭐든 상관없습니다. 생각 없는 것보다야 시시콜콜 의미를 따지는 편이 낫습니다. 투박하게나마 정의 아닌 정의를 해보면 세계사적 의의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나 물질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지위, 가치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이런 것들은 고정불편의 것들이 아니어서 끊임없이 평가를 받습니다. 변화무쌍하다는 것은 예측이 쉽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여기 세 권의 책이 있습니다. 나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세상,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물질의 세계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세계사적 의의를 탐구한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는 말과 바꿔 써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듯합니다. 이 책들은 서로 다른 형식과 수준에서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습니다. 접근방식은 물론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 또한 많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의 너비와 깊이에 있어서는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요구든 상관없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우리에게 도전과 화해를 걸어옵니다. 그 각각에 대해 좌절 혹은 희열로 반응할 수 있지만 인생이 이분법적인 감정으로 갈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즐거웠다가 화나기도 하고, 피식 헛웃음이 나는 상황도 종종 맞습니다. 터무니없게도 행복 속에 말도 안 되는 불행이 똬리를 튼 통에 곱절로 힘든 세월을 겪기도 합니다. 세계가 운행되는 원리를 알면 어느 때보다 담대하게 세월을 운영할 수 있을까요? 그게 아니라도 대단히 사적인 문제에 빠져 마구 허우적거리는 일만은 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원래 나는 나비이고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이 꿈속인가?



앞서 언급한 세 권의 책은 어떤 관점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지, 세계의 구성 원리는 무엇이며 현 세계에서 미시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떻게 되는지 가늠할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각각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운이 좋다면 혹 지름길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탈 수 있다면, 적어도 앞서 경험한 이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린 어느 때보다 많은 일을 계획하고 그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 세계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촘촘한 그물망이다. 대상은 처음부터 고유한 속성을 지닌 자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다른 대상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관련 속성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관계적 존재다.



첫 번째 주인공은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전작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로 폭넓은 이목을 끈 카를로 로벨리의 작품입니다.


돌은 그 자체로는 위치가 없고, 충돌하는 다른 돌에 대해서만 위치를 갖는다. 하늘은 그 자체로 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의 눈에 대해서만 색깔을 갖는다. 하늘의 별은 독립적인 존재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별이 속한 은하계를 이루는 상호작용 네트워크의 한 매듭일 뿐인 것이다.



위 비유는 저자가 관계론적 해석의 측면에서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과정에 등장한 예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 보면 말이죠. 비유가 지닌 의미심장한 의미는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표면적으로 위 글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대단히 직관적입니다. 위 글에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하늘은 그 자체로 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의 눈에 대해서만 색깔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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