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파편 — 소설가 한강을 만나다
프롤로그: 유리 파편 위에 내려앉는 눈송이의 정적
엘리너 와크텔은 인터뷰를 앞두고 상대의 문장이 가진 ‘온도’를 먼저 살핀다. 한강의 문장을 읽는 것은 영하의 추위 속에서 정교하게 깎인 유리판 위를 걷는 일과 같다. 너무나 투명하여 그 너머의 진실이 보이지만, 어느 순간 발밑이 깨져나가며 차가운 심연으로 침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적한 주택가, 한강 작가의 집필실은 창밖으로 내리는 눈송이가 유리창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정밀(靜謐)했다.
그녀는 수줍은 미소로 차를 내왔지만, 그 가녀린 어깨 뒤로는 그녀가 짊어지고 온 우리 시대의 거대한 비명들이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온몸으로 거부했던 육식의 폭력, 『소년이 온다』의 소년들이 차가운 바닥에서 서로의 온기를 찾으려 했던 그 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의 눈 덮인 제주 숲까지. 그녀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인간의 ‘연약함’과 그 연약함을 훼손하는 ‘힘’에 매달리는 것일까.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천명관의 대륙적 서사와는 전혀 다른, 한 사람의 내장 속까지 파고드는 시적 긴장감에 대해 묻기로 했다. 그것은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영하의 온도에서도 얼어붙지 않는 피의 온기 같은 것이었다.
거부의 윤리: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의 존엄
대화의 시작은 그녀를 세계적 작가로 각인시킨 『채식주의자』였다. 와크텔은 인물의 행동을 사회적 현상이 아닌, 존재론적 결벽으로 해석하는 데 탁월하다.
질문: “작가님, 당신의 인물들은 종종 무언가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하려 합니다. 특히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고 급기야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나무가 되려 하죠. 이 지독한 결벽은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성으로부터 영혼을 지키려는 당신만의 처절한 방식인가요? 인간으로 살기 위해 인간임을 포기해야 하는 이 역설을, 작가인 당신은 어떤 표정으로 지켜보았습니까?”
한강은 찻잔을 감싼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미세한 떨림이 스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공간 전체를 진동시키는 묵직한 힘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영혜에게 육식은 타인을 해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인 폭력을 의미했죠. 그녀가 나무가 되려 한 것은 단순히 광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어떤 고통도 전이시키지 않는 ‘무구한 존재’로 남고 싶다는 순결한 투쟁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도가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그가 내뱉는 마지막 절규를 끝까지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극단적인 거부만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유일한 보루가 되기도 하니까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저에게도 살이 베이는 것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고통의 곁에서 머물기: 흉터 위에 포개는 문장의 예의
한강의 시선은 개인의 실존에서 멈추지 않고 역사의 거대한 상처로 확장된다. 광주와 제주라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지점들을 통과하며 그녀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질문: “천명관 작가가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대한 야생적 에너지로 묘사했다면, 당신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 으스러진 개개인의 ‘살결’에 집중합니다. 역사라는 대문자 뒤에 가려진 소년들의 이름을 불러내는 작업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그 참혹한 고통의 현장을 이토록 오랫동안 응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그날의 소년들이 지금 이 방 안의 정적 속을 소리 없이 걸어 다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글을 쓰는 내내 육체적인 통증이 뒤따랐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는 매일 저녁 샤워를 할 때마다 소년들의 차가운 시신이 떠올라 숨이 막혔죠. 하지만 누군가는 그 곁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은 해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잊혀가는 비명 옆에서 끝까지 함께 울어주는 일입니다. 제게 글쓰기는 그들의 고통을 대신 겪는 오만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흉터 위에 제 문장을 조심스럽게 포개어놓는 겸허한 애도의 행위였습니다. 그 흉터들이 나를 밀어냈지만, 동시에 나를 붙잡아주기도 했습니다.”
시적 언어의 조각: 언어라는 불완전한 구원을 향하여
한강은 소설가이기 이전에 시인이기도 했다. 그녀의 산문이 지닌 독보적인 리듬감은 독자를 최면 상태로 몰아넣는다. 와크텔 스타일의 인터뷰는 문체의 미학을 존재의 양식과 연결한다.
질문: “작가님의 문장은 시(詩)에 가깝습니다. 설명하기보다 보여주고, 선언하기보다 암시하죠. 소설이라는 산문의 형식 안에서 이토록 팽팽한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언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인가요, 아니면 그 자체로 하나의 조각상인가요?”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언어는 늘 부족하고 배반적입니다. 제 안의 진실은 이토록 뜨겁고 거대한데, 언어라는 좁은 틀에 담으면 늘 넘치거나 모자라죠. 그래서 저는 문장을 쓸 때 조각가처럼 깎아내고 또 깎아냅니다. 불필요한 감정의 수식어를 걷어내고 뼈대만 남겼을 때, 비로소 그 문장에서 영혼의 숨소리가 들린다고 믿거든요. 제게 문학은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로 완전한 침묵에 가닿으려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나 멈출 수 없는 시도입니다. 그 실패의 과정이 저에게는 가장 진실한 소통이었습니다.”
축제가 끝난 뒤의 정적: 작별하지 않는 마음의 무게
인터뷰의 종착지는 작가로서의 삶, 그 지독한 고독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와크텔은 인터뷰를 닫으며 상대방이 평생 품고 갈 씨앗이 무엇인지 묻는다.
질문: “작가님, 당신이 수천 명의 영혼을 대신해 울고 난 뒤, 그 문장들이 책으로 묶여 세상을 떠돌 때, 정작 당신의 내면은 무엇으로 채워지나요? 이 지독한 고통의 기록들이 결국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길 원하십니까? 여전히 당신은 고통의 편에 서 계신가요?”
한강은 창밖의 눈을 보며 작게, 아주 작게 읊조렸다.
“저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완벽히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그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닿으려 노력하는 그 간절함, 그 마음 자체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고 믿어요. 제 소설들이 독자들에게 어떤 위로가 되길 바라기보다, 그저 그들이 한 번쯤 자신의 안을 흐르는 서늘한 피의 온기를 느꼈으면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서로의 흉터를 알아볼 수는 있으니까요. 그것이 제가 이야기하는 ‘작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끝내 작별하지 않는 빛 말입니다.”
에필로그: 어둠 속에 켜진 작은 촛불의 응답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서울의 밤은 차갑고도 고요했다. 천명관과의 대화가 끝나고 느껴졌던 것이 들끓는 갈증이었다면, 한강과의 대화 끝에 남은 것은 서늘한 정화(淨化)였다. 그녀는 마지막 배웅을 하며 눈송이처럼 가벼운 악수를 건넸다. 그 손길은 연약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세상을 홀로 뚫고 나가는 강인한 심지가 느껴졌다.
엘리너 와크텔은 좋은 인터뷰란 “한 사람의 인생을 다시 살게 하는 마법”이라고 했다. 오늘 나는 한강이라는 정교한 유리궁전을 여행했다. 그곳은 훼손된 인간의 자취로 가득했지만, 그 파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그 어떤 빛보다 눈부셨다. 그녀가 여전히 눈 내리는 고요 속에서 문장을 깎아내고 있는 한, 우리의 기억은 쉽게 풍화되지 않을 것이다.
작업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문장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작은 촛불과 같다고. 그 빛은 작지만, 그 곁에 모인 이들의 시린 손을 녹여주기엔 충분했다. 나는 그 온기를 품고, 다시 나의 문장을 쓰기 위해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 글은 엘리너 와크텔의 인터뷰 스타일을 차용하여 작가의 실제 인터뷰와 작품 세계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