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riginal Mind] 허무의 폐허 위에

지어 올린 서사의 바벨탑 — 소설가 김영하를 만나다

by 안녕 콩코드

​프롤로그: 세련된 냉소와 우아한 위트가 교차하는 방

​엘리너 와크텔은 "작가의 목소리는 그가 세상을 견디는 방식 그 자체"라고 말했다. 김영하의 목소리는 경쾌한 리듬을 타고 흐르지만, 그 끝맛은 서늘하다. 그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견고한 현실이 사실 얼마나 위태로운 가설 위에 세워져 있는지, 그리고 그 허망함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합법적 마약'이 결국 이야기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다. 그의 집필실은 천명관의 먼지 쌓인 작업대나 한강의 촛불 켜진 밀실과는 전혀 달랐다. 잘 정돈된 디지털 기기들과 분류된 서적들, 마치 예리한 수술을 앞둔 실험실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도시의 소음과 고독을 세련된 문장으로 변주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타인의 죽음을 디자인하던 청년 작가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무너져가는 기억의 파편을 붙잡고 절규하는 노인이 되었고, 『작별인사』에서는 기계와 인간의 경계에 서서 존재의 본질을 묻는 철학자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당신의 인물들은 그토록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지, 혹은 가짜 세계로 침잠함으로써만 비로소 안식을 얻는지. 그의 대답은 예상보다 훨씬 명징하고도 도발적이었다.


​죽음과 탐미: '나를 파괴할 권리'라는 근원적 자유

​첫 질문은 90년대 한국 문단에 커다란 균열을 냈던 그의 데뷔작이자, 여전히 그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로 시작했다.


​질문: “작가님, 당신은 등단 초기부터 ‘죽음을 돕는 자’를 내세워 우리 사회의 금기를 건드렸습니다. 당신의 인물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따분하고 비루한 현실로부터 탈출하는 가장 탐미적인 방식처럼 묘사됩니다. 세상을 파괴하는 대신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를 옹호하는 그 냉소는, 사실 거꾸로 삶에 대한 지독한 갈망이 내뱉는 반어법입니까?”


​김영하 작가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의 눈빛은 상대의 질문을 즐겁게 해부하는 학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냉소라기보다 정직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여행자들이죠. 삶이 무조건 숭고하다는 당위적인 거짓말보다는, 삶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지를 먼저 인정할 때 비로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힘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제 인물들이 자신을 파괴하려 할 때, 역설적으로 그들은 생의 가장 뜨거운 순간을 마주합니다. 안전한 일상을 버리고 심연을 들여다보는 그 찰나의 불꽃이야말로 제가 기록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저에게 허무는 피해야 할 수렁이 아니라, 이야기를 짓는 가장 비옥하고 단단한 토양입니다.”


​기억의 미궁: 정체성이라는 유약한 서사

​그의 문학적 성취 중 하나인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억의 불확실성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간을 뒤흔든다. 와크텔은 이 대목에서 ‘기억’이 어떻게 한 개인을 규정하고, 동시에 배반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질문: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은 기억을 잃어가며 자신의 정체성조차 잃어버립니다. 기억이 거세된 인간에게 남는 본질은 무엇일까요? 당신에게 기억이란 진실의 정직한 기록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매일같이 덧칠하고 편집하는 유연한 소설입니까?”


​그는 지적인 흥분으로 반짝이는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기억은 사실 가장 믿을 수 없는, 그리고 가장 게으른 이야기꾼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정당화하고 지탱하기 위해 과거를 끊임없이 각색하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인생이라는 소설을 쓰는 전업 작가들입니다. 기억이 무너진다는 것은 내가 공들여 쌓아 올린 세계가 붕괴하는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그 폐허 속에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세련된 정체성이 무너진 뒤에 남는 '날것의 공포'를 생생하게 중계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믿는 이야기의 집합체일 뿐이니까요.”



​이야기의 구원: 소설이라는 불온한 마법

​김영하는 소설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야기의 힘’을 역설해왔다. 와크텔 스타일의 인터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포스트 휴먼 시대에 문학이 가져야 할 실질적인 효용성을 묻는다.


​질문: “작가님은 소설이 우리를 잠시 ‘다른 사람’이 되게 함으로써 구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때로 소설보다 더 기이하고 참혹합니다. 인공지능이 서사를 생성하고, 자극적인 숏폼이 넘쳐나는 시대에 허구의 이야기를 짓고 읽는 것이 어떤 실질적인 힘을 가질까요? 소설은 그저 일시적인 진통제입니까, 아니면 현실의 중력을 버티게 하는 단단한 뼈대입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창밖의 복잡한 도심 풍경을 내다보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설은 도피처이면서 동시에 가장 치열한 훈련장입니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이 되어 내가 평생 겪어보지 못할 고통과 기쁨, 범죄와 희생을 대리 체험하죠. 이 과정에서 우리 안의 ‘공감의 근육’이 자라납니다. 현실이 아무리 참혹해도, 우리에게 이야기를 읽고 쓸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그 무의미한 고통에 ‘의미’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의미가 부여된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일방적으로 무너뜨리지 못하죠. 저는 소설이 세상을 혁명적으로 구원할 수는 없어도, 단 한 사람의 영혼이 허무의 벼랑 끝에서 추락하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소설이라는 불온하고도 아름다운 마법의 본질입니다.”


고독의 기술: 박수 소리가 잦아든 뒤의 공백

​대화는 이제 그의 화려한 지적 유희를 넘어, 홀로 남겨진 작가의 책상으로 향했다. 와크텔은 거창한 담론 뒤에 숨은 인간의 '부재'를 묻는 데 탁월하다.


​질문: “작가님, 당신은 팟캐스트, 방송, 강연 등을 통해 수많은 대중과 소통해왔습니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목소리를 차단하고 지독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죠. 화려한 지적 소통 뒤에 찾아오는 그 고적함을 당신은 어떻게 다스립니까? 당신의 냉소는 혹시 그 고독을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인가요?”


​김영하의 눈에서 잠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고독은 다스리는 게 아니라 그냥 껴안는 겁니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의 저는 사실 굉장히 지루한 사람이에요. 독자들은 제 소설의 반전을 기대하지만, 제 일상의 반전은 '오늘 점심엔 무엇을 먹을까' 정도에 불과하죠. 하지만 그 지루함과 고독이야말로 작가에게는 가장 순수한 원재료입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가 찾아와야만 비로소 내면의 가짜 목소리들이 사라지고, 진짜 이야기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거든요. 저는 그 외로움을 즐깁니다. 세상으로부터 잊혀질 권리를 누릴 때, 작가는 가장 자유로워지니까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사람들은 제가 냉소적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저 삶의 허무를 조금 일찍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허무를 받아들이면 고독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아요. 어차피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길인데, 그 사이에 재미있는 이야기 몇 편 남길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장사 아닌가요?”


에필로그: 산책자가 남긴 허무의 발자국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도시는 여전히 분주했고 불빛들은 차가운 파편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김영하와의 대화는 마치 잘 짜여진 추리 소설 한 권을 읽은 듯 명쾌하면서도, 동시에 해소되지 않는 근원적인 허무를 남겼다. 그는 문앞까지 나와 "다음에는 가짜가 아닌 진짜 술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누자"는 가벼운 농담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엘리너 와크텔은 "위대한 작가는 우리에게 답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질문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영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의 커튼을 단숨에 걷어내고 그 뒤에 숨은 서늘하고 기발한 진실들을 보여주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아마 오늘도 도시의 거리를 산책하며, 누군가의 잃어버린 기억이나 지하철역에 버려진 욕망을 수집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들을 엮어 우리에게 또 다른 ‘멋진 신세계’ 혹은 ‘지독한 지옥’을 보여줄 것이라고. 그의 서사가 계속되는 한, 우리의 덧없는 삶도 조금은 덜 외롭고, 조금은 더 흥미진진한 탐험이 될 것 같았다.



본 글은 엘리너 와크텔의 인터뷰 스타일을 차용하여 작가의 실제 인터뷰와 작품 세계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