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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코드 Jul 30. 2024

딸이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일상의 그늘 밑, 저편


젓국 갈비 먹은 이야기부터 아들에게 전하는 말과 타고난 큰 목소리의 비밀, 일상에서 마주친 소시오패스까지"


젓숙 갈비. 발음이 매끄럽지 않지만 맛은 담백하다


색다른 음식, 젓국 갈비  

젓국 갈비. 전골 형태의 음식으로 맑은 국물에 갈빗살과 파 등속을 넣고 한소끔 끓여 낸다. 국물은 강화도에서 잡은 새우젓으로 간할 텐데 그곳 새우젓은 유독 작고 짜다. 의외로 국물은 심심하다. 섬사람들이 짜게 먹는다는 속설과는 정반대다. 물론 간을 더하지 않고 그냥 먹어도 어느 정도 간이 맞는다. 곁들여 내놓은 소이 소스에 찍어 먹으면 간이 아주 잘 맞는다.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젓국은 별스러운 음식임이 틀림없다. 젓국 갈비에서 방점을 갈비에 찍은 아이들은 갈비구이를 기대한 눈치다. 그릇에 반 정도 떠선 그마저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그 이유로 첫째가 물에 적신 고기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찰진 답변을 내놓았다. 입 밖으로 의견을 내지 않았지만 둘째도 같은 뜻이라는 건 눈동자에서 충분히 읽었다. 젓국은 아침 식사용이었으므로 점심으로 한정식 외에 갈비구이를 샀다. 반색한 아이들은 게 눈 감추듯 구이를 먹었다. 삶은 돼지고기도 싹싹 비웠으니 안 샀으면 오래 원성 살 뻔했다. 어른들 얘기로 돌아와서 그분들의 말본새를 흉내를 내면 젓국 특유의 ‘허여멀건’ 국이 오랜 기억 속에 자리 잡을 거 같다.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고들빼기나 갓김치가 생각나는 맛이랄까? 입안에 감도는 감칠맛의 정체는 더 볼 것 없이 로스탤지어다. 이 글에 설프게 소개된 음식점은 남문식당과 수라정이다. 남문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소화 겸 산책 삼아 전등사 문턱 근처에 올랐다. 그 후 토크라피에서 커피를 마셨다. 석모도의 보문사에서 앞바다 경치를 구경한 뒤에는 수라정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마레 616에 들러 목련차를 마셨다.



딸의 야심찬 독힙선언 . 넌 다 계획이 있구나!


동생이자 딸의 독립 전후, 언젠가는 떠날 걸 조금 앞당긴 거라고 생각하자. 

아들아! 마음을 깊이 안 써도 된다. 동생이 나가서 사는 건 네가 동생에게 일찍 들어오라거나 동생이 합당한 이유 없이 새벽에 집을 나가려는 걸 막아서 생긴 일이 아니다, 동생은 이미 독립적으로 살아갈 나이가 됐고 이미 그럴 마음을 품은 뒤에 그런저런 상항이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란다. 언젠가는 떠날 집을 조금 일찍 떠난 거로 생각하자, 살아보니까 인생은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더구나. 옳은 선택이든 그른 선택이든 선택한 사람이 책임을 지게 되는 거지. 기왕이면 너끈히 이겨내길 바라자. 좀 더 강하게 막아섰다면 되지 않았을까 싶은 후회조차 사실 돌아보면 허망한 것이더라. 당시엔 상대방의 결심을 돌이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잘 알지 않던? 설혹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시기의 문제일 뿐 나가 살려는 마음을 근원적으로 돌이킬 순 없었을 거다. 가슴 한켠이 꽉 막힌 듯한 심정이지만 아빤 그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엠지 세대는 원래 그렇다는 말에 아빤 할 말을 잃었다. 자꾸 깜빡하는 것도 그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아 생긴 일인데 잘못하다간 큰일 내겠다 싶더구나. 앞으론 걱정을 좀 덜어낼 테니까 마음 쓰지 마라. 아직 아빠는 쌩쌩하다.



지긋지긋한 확성기 소리


큰 목소리를 타고나는 경우란 없어요.  

통화할 때 목소리가 크면 고충이 이만저만 아닐 게다. 일단 당사자부터 무척 난감할 텐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천생이라 고치기 힘들다니 주변 사람들로선 기어코 체념하지 않을 수 없다. 작게 내고 싶어도 못 내는 사람 심정이야 오죽할까 싶었는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제대로 감정이입 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런 결말이라면 정말 위 아더 월드다! 실제 겪어보면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말, 실감이 난다. 시시콜콜한 집안 이야기부터 뉘 집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느냐는 정도의 가십거리를 맨날 몇 번씩 듣는다고 해보자. 귀에서 피가 나지 않는 게 다행이다. 참다 참다 목소리를 조금 낮춰달라고 부탁하면 난들 어쩌라고,라는 반응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혹 가물에 콩 나듯 고쳐보겠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딱 다음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 만이다. 어느 날 기묘한 장면을 포착했다. 화통을 한 스무 개쯤 삶아 먹었을 그가 잔뜩 상체를 웅크리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가, 사적 통화에 열을 올릴 때에도 그리 당당할 수 없던 그가 영락없이 수화기 속으로 빠져든 모양새를 취했다.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바닥을 기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천생 큰 목소리의 소유자라 작게 소리 내는 게 불가능한 줄 알았던, 그 스스로 누누이 불치병처럼 떠벌린 예의 그 유난스러운 목소리가 옆자리에 앉은 내게 조금도 들리지 않다니. 그는 조금도 면구스러워하지 않았다. 뻔뻔한 사람들이 꽤 있다. 예의라고는 손톱만치도 없는 사람들, 에티켓을 거추장스러워하는 사람들이 고개 쳐드는 사회를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바라지도 않는다. 사회 구성원이라면 최소한의 양심, 도적의 최저선이라도 지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



픽사베이 검색창에 소시오패스를 쳤더니


쥐뿔만도 못한 권력, 함부로 휘두를 일 아냐.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의 예

70년 대풍 남성이 살아 돌아왔다.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사내, 남이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아는 인간형. 잘못은커녕 실수조차 인정하는 않는 남성의 그림자가 어느 한구석 얹히지 않은 틈이라곤 없는 남자, 아니 여자 얘기다. 그는 하루에도 수차례 뻔한 규모의 사무실에서 코를 풀었다. 세상 큰 소리에 다들 깜짝 놀라기 일쑤, 누런 건더기가 연상될 정도의 짙은 여운까지....  그날 아침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글의 사자 같은 느낌 아닐까? 누구도 건들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쓰레기 같은 인간의 일상 말이다, 생각이 있다면 나가서라도 코를 풀 테지만 그는 한 번도 밖으로 나가서 해결하지 않았다. 몇 번에 걸쳐 주의를 줬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인간인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자신의 모습을 사회라는 거울에 비추지 못하는 사람을 통칭해서 소시오패스라고 한다. 관련 백서만 이미 수십 페이지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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