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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코드 Sep 02. 2024

첫 문장의 기적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었다



강렬한 서사, 그림 같은 묘사, 풍부한 구성, 압도적 인물, 몰입을 고조할 파격적 장치 등에 앞서 작품의 전체적인 인상을 쥐락펴락하는 부분은 사실 따로 있다. 도입부, 첫 문장이다. 그 문장들을 로 소개한다. 감탄사가 연발하는 문장에 어떤 설명이든 가 닿기나 할까 싶어서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 흡사하게,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었다. -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 《무진기행》, 김승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 《이방인》, 알베르 카뮈





오래도록 사랑받는 문장에는 곰삭은 맛이 있다. 마치 한 편의 완성도 높은 드라마가 그 문장에 응축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종잡을 데 없는 심상의 정체를 몇 줄로 단아하게 그려내 눈물을 쏙 빼게도 하는 등에서 그런 문장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무심코 읽어 내려간 문장이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을 정면으로 관통한 것에 화들짝 놀라다채롭게 수놓은 이야기에 대자로 누워 한낮의 나른함을 만끽하는 일이 흔치 않게 되었다.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의 밑자락을 그러쥐고 온몸이 휘청일 정도로 소설에 빠져 들 수 있다면 그 한 문장이 지닌 힘에 무감각하기란 어렵다. 마법과도 같은 요소를 지닌 문장과 조우한 날이면 신열로 밤잠을 설치는 일이 허다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여든 날 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 -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 - 《백 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 《마션》, 앤디 위어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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