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오전. 기사 제목부터 생경했다. 한국인이 노벨상 수상자라니. 그것도 하마평이라곤 없던(?) 작가가. 순간 고은이 뇌리를 스쳤다. 워낙 많이 노벨상 후보자로 거명되었던 고은이 아니다. 한강이라고? 낯선 호명에 잠시 멍한 느낌이 들었다. 이어 ‘과연 한강’이라는 찬탄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한강의 작가적 재능이나 성취를 무시해서 그런 반응을 보였던 게 아니다.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날아든 낭보에 순간 넋이 나가듯 그날 난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묵묵히 제 길을 개척해 나간 이에게 주는 값진 보상이려니, 생각했다. 설레발 많았던 고은이 아니어서도 좋았다. 독특한 형식과 기괴한 서사로 한국문학의 외연을 확장해 온 작가 한강. 내가 그를 처음 대면한 건 2007년의 일이었다. 그의 대표작이자 금번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를 통해서였다. 그해 10월, 그 소설은 《몽고반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비효율’에 관한 글을 쓰려던 오늘의 계획을 잠시 미뤄두었다. 내친김에 블로그를 뒤졌고 거기서 두 편의 글을 찾아냈다. 〈몽고반점-성적 욕망의 코드, 그리고 일탈〉이라는 제하의 리뷰. 작성일자는 2007년 11월이다. 다른 한 편은 리뷰 형식의 미완성 초고로 비공개 설정된 채 남아있었다. 제목조차 지극히 평범한 ‘글’. 기록일자란에 2011년 11월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몽고반점-성적 욕망의 코드, 그리고 일탈〉
어느 날부터 처제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로테스크한 꿈 때문이라는데 그것이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본 가족들은 그녀에게 달려들어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들고 그런 가족들의 비인간적인 행태에 분노를 느낀 그녀는 손목에 칼을 댄다. 정신병원을 나온 그녀에게 성욕을 느낀 나는 예술을 가장해 접근한다. 배설욕구를 채운 늦은 오후 아내에게 발각되는데......
세 편의 단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 중, 후로 연결되고 그것이 밀도 높은 장편을 이루는 스토리 전개와 각각의 단편이 완결된 형태로 전체 구도 속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안착한 이 소설은 상황설정뿐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불가해한 행동 특성들을 전면에 돌출 배치함으로써 독자의 몽환적 몰입과 감정이입을 고도의 수준으로 이끌어낸다. 가족 내 갈등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 수준은 골목 어귀에 동그마니 놓여 있는 개울물 보다 얕고 시간 또한 크게 보면 고작 며칠 동안만 빛이 비치는 은하계 외곽의 항성만큼 낯설다.
캐릭터는 어떤가. 그닥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와 연결되지 않는 꿈 때문에 고기에 손도 대지 않는 처제, 사위와 아들을 시켜 딸의 몸을 잡게 하고 막무가내로 딸의 입속에 고기를 쑤셔 넣는 아버지, 꿈을 꾼 이후 이상한 언행을 보이는 아내를 단박에 내치는 동서, 3개월 넘게 섹스 한 번 하지 않아도, 남편이 남다른 행동을 보여도 캐묻지 않는 아내....... 주인공인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 나는? 특히 동서는 예술한답시고 가계엔 보탬도 되지 않는 나를 이물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고 한량백수로 치부한다.
너나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약점 잡힌' 사람들은 평범하지도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은 평범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다. 경계인. 어느 한 편에 설 수 없는 인간군, 양쪽으로부터 의혹의 눈길을 받아야 하는 불안한 인간군상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주, 그리고 언제나 일탈로 비친다. 일탈은 혼란을 부추기고 혼란을 대하는 사람들의 눈은 불안으로 크게 떨린다. 경계인과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들을 모두 불안으로 내모는 힘. 그래서일까. 그들 경계인들이 퀭한 얼굴로 침착하게 엮어 가는 소설 속 이야기는 소름 끼치는 법 없는데도 오싹하다. 기괴하다.
아니 고요하다. 천마산에 올랐던 어느 가을날 찬 오후, 늦게 시작한 하산으로 걱정이 앞선 나는 지름길을 찾아 계곡에 들어섰다. 오래지 않아 시퍼렇게 다가왔던 낭패감. 길 없는 길을 덤불을 헤치며 한참을 전진하던 난 이성을 밀치는 이상한 심사에 사로잡혔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평온함, 어느 때 한 번이라도 겪어보지 않은 평온함이 가득 몰려들었다. 사위는 더할 나위 없이 고요했다. 그런 고요라고 생각했다. 그 고요는 불안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불안을 가장한 고요. 폭발성을 내장한 고요는 스스로 잦아들지 않는다.
주인공인 '나'는 그저 평범한 40대 중반의 배부르고 머리숱 많지 않은 전형적인 사회인이다. 비디오 작업을 취미로 하는 그에게 어느 날 아내는 처제에게 아직 몽골반점이 있을 것이라고 얘기해 준다. 몽골반점이 엉덩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몸 한쪽이 곧추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처제를 설득한 그는 처제의 몸에 무수히 많은 꽃잎과 줄기를 그려내고 온몸 구석구석을 카메라에 담는다. 엉덩이의 몽고반점은 더욱 강렬하게, 뚜렷하게, 그것도 아주 오래..... 꽃에 도착적인 반응을 보이는 처제의 약점을 포착한 그는 과거 여자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몸에 같은 문향을 그리고 처제와 비디오 작업을 빙자한 섹스를 벌인다. 도덕과 이성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 그것들은 인간본성의 사악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환원한다. 마침내 그 파괴적 양상은 종말적인 결과를 맞이하고, '나'는 잠적하며 동서는 등장하지 않고 처제는 정신병동에 재감금된다. 아내는 여전히 고요하다. 그런 아내가 그들의 현재를 고발한다.
차창에 바짝 기대어 차장 밖을 보면 빠르게 스쳐가느라 형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던 사물들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또는 눈길을 저 멀리 던지면 또렷하게 보이는 것처럼 독자의 시선이 뒤늦게 아내에게 꽂히는 순간이다. 불현듯 '살아남은' 아내야말로 가장 그로테스크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지나치리 만치 평정심을 잃지 않은 아내였다는 자각이 이제야 드는 이유가 뭐였을까. 피해자와 가해자(종말적인 결과를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 그녀의 독백에서 비롯한, 그리고 사건의 발단이 된 가족들의 동생에 대한 막무가내식 처방에 저항 없이 참여한)의 양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내는 피동적인 현대인들을 투사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부여된 역할에 정신과 몸을 무의식적으로 의탁한 채 상황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여하한 형태의 주의주장도 펼치지 않는다. 그러니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가정을 남발하는 그들의 언어와 행동은 대부분 수동태다.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때늦은 아내의 가정은 적극적인 수습의 의지가 동반되지 않고 막다른 골목으로 흘러든다. '...... 이건 말이야....... 어쩌면 꿈인지 몰라.' 독백하듯 동생을 바라보는 장면을 끝으로 소설은 서둘러 막을 내린다.
1편의 제목은 '채식주의자', 2편은 '몽고반점'이다. 3편은 '나무불꽃'이다.
영화 '채식주의자'의 한 장면
<글>
한강은 〈채식주의자〉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아마 3,4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집 가까운 서점에 들러 이 책 저 책 둘러보다 정말 운명처럼 그 책을 만났다.
동네 서점이라고 해도 제법 규모를 갖춘 서점이라 여러 분야의 책들이 들고나는 그 서점엔 서가에 꽂힌 책들의 명멸이 심했다. 특히 소설의 회전율이 높았는데, 한창 주목받는 소설이 아니면 잘 보이는 서가에 놓이지 못했고 인기 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판매량이 신통치 않으면 자주 서가 밑단으로 밀려났다. 밑단의 책들은 한두 달새 소리소문 없이 처분되는 듯했다. 잘 나가던 정치인, 방송인도 하루아침에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세상살이 모습을 난 서점의 소설서가에서 자주 목격하곤 했다.
그런 탓에 마지막 쇄가 1년 전 어느 날로 선명하게 박힌 그 책이 서가 밑단에서 한 해를 보내고도 살아남은 이력이 궁금했다. 그렇다고 이유를 서점주인에게 묻기는 쉽지 않았다. 주인이 이 소설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어서거나 누군가 나중에 사려고 서가 밑단, 그것도 눈에 잘 뜨지 않는 지점에 꽂아놓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내 가야 할 책을 주인이 깜빡 잊었을 거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책은 윗면에 잔 먼지가 제법 쌓인 것 말고는 아주 깨끗했다.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고 책장을 열었다. 저자 프로필을 보고 목차를 살핀 뒤 첫 장을훑었다. 이어 “토르륵” 책장을 넘기던 손을 빠르게 놓았다. 거푸 서너 장을 읽었다. 그리곤 두말하지 않고 이 책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셈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소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푸 읽은 페이지엔 과거에 소설에서 그런 장면을 읽었을 거라고는 전혀 짐작되지 않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기괴하다거나 눈길을 끌 만한 참신한 무엇이 있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불안한 기색의 화가와 그의 모델 제의를 선뜻 받아들인 처제, 그리고 거듭 등장하는 처제의 육식에 대한 공격성, 그리고 몇 장을 더 넘기던 눈에 박혀 종내 그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던 몽고반점 등등이 조각난 퍼즐처럼 머릿속에 소용돌이쳤다. 그때까지 서점 안에서 들리던 말소리와 발자국소리가 완전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정지된 시간이 빠르게 책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빠르게 책을 덮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책의 힘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둘러 셈을 치른 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소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가와 체제, 그리고 친언니로 시점과 주인공을 달리하며 돌진하는 소설은 결말에서 주춤하는 듯한 양상을 보였지만 그 부분조차 충분히 아련한 여백으로 돌려세울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기존에 내 안에 형성되었던 소설독법과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숙제를 남겨놓은 것도 그 소설이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한강은 선뜻 다가서기가 쉽지 않으면서도 자꾸 눈이 가는 소설군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한 번의 실패와 재도전이 있었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채식주의자〉에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 압도된 뒤라 관성적으로 그런 것들을 바라고 읽은 탓에 밋밋했고, 1년이 지난 지금 손에 쥔 〈희랍어 시간〉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본령에 다가서는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게 하는 힘을 지녔다.
한강. 눈으로 보는 한강의 깊이와 너비는 대충으로라도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안에 사는 생물의 생태계를 알 수 없듯이 한강이 낸 작품들의 가짓수와 그 작품들에 내재한 인간실존의 실체를 가늠하기 어렵다. 여느 작가와 다른 독법은, 그렇게, 한강이 지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속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의 의식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선 여러 해가 필요할지 모를 까마득한 느낌이 스멀거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래서 더더욱 가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