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부/캐나다 여행기 2탄-27년 전 그날]

그가 미국에 간 까닭

by 콩코드


1996년, 그러니까 미국과 캐나다로 여행을 떠나기 바로 전 해에 중앙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전사적으로 감사를 벌였다. 직장에 갓 들어온 – 고작 1년이나 되었을까? - 새내기에게 지상과제가 떨어졌다. 맡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라는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장아장 걸을 줄이나 겨우 아는 강아지에게 허들을 넘으라고 종용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될 법한 일이었으랴! 한편으로는 뭘 믿고 저러지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든 잘 해내고 싶었다.



감사라는 게 보통 수감 기간의 업무 처리에 잘못이 없는지, 현재 해당 업무를 누수 없이 잘 해내고 있는지,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가 따로 있는지 등을 살핀다. 경중에 따라 징계도 주고 표창도 내리는 게 감사다. 표창은 감사히 받겠지만 앞에 건 글쎄다.



철마다 곧잘 하던 일이었는지 다들 서고에서 철 지난 서류를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1년 차 코흘리개에게는 그저 난감하네, 라는 타령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통 감이 오지 않았다.



뭘 해야하는지도 모른 채 일단 부서에 배속받고 수행한 일을 들췄다. 딱히 잘못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알려 주면 좋으련만 다들 자기 일에 바빠 디른 사람 사정을 봐줄 눈치가 아니었다. 미간을 찌푸렸다. 뒤에서 누군가가 부른다. 호칭은 우씨라고 해두자.



- 우씨, 이리 와봐.



차장 A였다. 동안에 형형한 눈을 가진 A는 모습답지 않게 잔머리가 대단했다. 그쪽으로는 익히 소문이 난 듯 그가 엉뚱한 지시를 내려도 부서원들은 별달리 대꾸 없이 처리했다. 뭔가 엉성한데 그가 하자는 대로 하면 뭐든 마무리는 되었다. 그것이 차장이 대우받으며 사는 방식이었다. 참으로 기괴했다.



누군 경륜이라고 했다. 또 다른 누군 잔머리의 대가라고 차장이 없는 데서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난? 별 인간이 다 있다 싶었다.





후일담이다. 차장은 잔머리를 넘어 약삭빠른 처신으로 갈아탔다~ 가 제대로 엮였다. 잔머리나 약삭빠른 거나 거기서 거기이긴 하다. 급기야 회삿돈에 손을 댄 차장, 여차저차 해서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떨려 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차장은 이명에 시달렸다. 나라도 그랬겠다. 워낙 많은 사람이 차장이 있건 없건 틈만 나면 혀를 찼었다. 기세가 크게 꺾인 차장은 ‘다된 밥상’에조차 숟가락을 올리지 못했다.



아마도 그날의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집 나간 뒤, 너무 몰입했다, 아니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차장이 며칠 전부터 회사 주위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 눈에 포착되었다. 뭘 또 주워 먹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들리는 말로는 전 사장을 시다바리하는 - 차장이 자주 사용한 그들 세계의 전문용어. 일본말 찌꺼기인데 차장 고향에서 주로 썼다고 전해진다. - 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서 푼돈이라도 구걸하는 모양이라고도 했다. 과연 그답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 차장이,





- 서류 줘봐. 이런 서류는 이렇게 구겨야지 오래돼 보이지. 그대로 두면 ‘가라’로 한 티가 나지 않겠어?


서류를 보란 듯이 이리저리 구기더니 한참 뒤에야 차장이 내게 그 서류를 건넸다. 차장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난 제대로 놀랐다. 서류는 요 근래 작성한 것이어서 깨끗했다. 차장이 지레짐작하듯 허위로 만든 서류가 아니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그걸 또 내가 아주 신박한 표정으로 자기 얼굴로 쳐다본 줄로 착각한 차장은 단어의 서두를 특히 강조하며,



- 그게 다 밥고, 밥!!



자리로 돌아온 나는 서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감사가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감사에 관계된 서류를 감사장에 올렸다. 한가지 서류는 뺐다. 차장이 좋은 평가를 받을 거라며 건넨 문제의 서류였다.



감사관은 나를 부르지 않고 반나절을 서류만 살폈다. 내심 불안했는지 차장이 내게 와 묻는다.



- 뭐 잘못 처리한 거 있어?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감사관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직원들은 이미 다른 감사관들에게 불려 나갔고 더러는 욕을 봤다. 나흘째 되던 날 드디어 감사관이 나를 호출했다. 무언가 된통 걸렸을 거라며 차장이 앞장섰다.


- 차장, 한가지만 말하겠소. 그렇지 않아도 직원들의 '가라' 서류에 신물이 났는데 이 친구는 그렇지 않더군. 솔직해. 그거면 됐어. 살펴보니 따로 지적할 것도 없구만.



차장은 반색했다. 한편으론 적이 걱정하는 눈치였다. 함께 자리로 오던 중에 차장이 물었다. 그거, 내가 준 서류 감사관에게 주지 않았어? 그걸 왜 줘요. 허위인데. 뭘 잘한 일이라고... 말끝을 살짝 흐렸지만, 차장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내내 차장은 내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감사가 끝나고 나를 비롯해 12명이 따로 9박 11일의 해외여행 포상을 받았다. 방문지는 미국 동부와 서부는 물론 캐나다 주요 도시 전역이었다.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들어온 지 1년이 갓 지난 친구에게 그런 영예가 주어질 리 없다는 게 이유였다. 어쩌랴! 사실인 걸.



그해가 빠르게 가고 이듬해 4월, 나‘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듀~ 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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