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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조우, 그 번잡함에 대하여

어떤 책은 기억에 남고, 또 어떤 책은 손에 넘겨지는가

by 콩코드


시간이 흐르는 아더랜드의 제네시스


며칠 전 '어떤 책'의 출간 소식을 듣고 서점 입고 여부부터 살폈다. 대형 서점 3곳 모두 입고 전이었다. 이틀이 지났다. 서판교에서 지인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약속시간까지는 1시간 30분이 남은 상태. 잘만 활용하면 약속장소에 닿기 전에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관건은 책이 구입을 서두를 정도로 강렬한 내용을 담고 있느냐에 있었다. 함량이 좀 떨어진다 해도 논거가 참신하면 구입할 용의가 있었다. 수내역 지하 1층에서 곧장 들어가는 <북스 리브로>로 향했다.



책은 생각보다 판형이 작았다. '우주, 지구, 생명의 기원에 관한 경이로운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인 책치고는 분량 또한 무척 실망스러웠다. 판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주', '지구', '생명'이라는 방대한 주제를 한 권에 담으려면 족히 500여 쪽은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책은 300여 쪽을 겨우 넘겼다. 직전까지만 해도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던 구매 욕구가 반감되었다. 내용이 받쳐준다면 셈을 치를 생각이 있다고 앞서 밝혔다.



한쪽, 두 쪽, 세 쪽을 읽었다. 이어 중간 부분을 읽은 뒤에 과학 분야 가판대에 조용히 문제의 책을 내려놓았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이와 유사한 상황에도 보통은 도서 구입을 서두르지 않는데, 이는 그 책이 독서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났다는 뜻이 된다.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룬 책이어서 나중에라도 필히 읽을 터였다. 다만, 기약할 수는 없었다. 19,000원의 책값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요즘 책값에 견줘 크게 비싸다고 할 수준이 아니다.





책을 가판대에 내려놓았다. 난감했다. 어떻게 쪼개서 낸 시간인데 허망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오래전 헌책방에서 본 《시간은 왜 흘러가는가》를 발견한 것이다. 안도했다. 믿고 보는 과학 저널리스트의 작품인지라.



저자 앨런 버딕은 시간이라는 정체에 관해 특별한 생각을 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시간이 유혹에 견줘 손색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임을 주지시켰다. 이후 독자의 상태가 번번이 악화되었는데, 한 번 버딕의 마법에 빠져든 독자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멈출 수 없이 강렬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버딕은 독자 수준보다는 높지만 대부분 얄팍한 지식을 동원해 시간을 두리뭉실하게 설명하는 일에 관한 한 재주가 '전혀' 없었다.



버딕은 최신 과학 정보를 총동원하였음은 물론 독자의 이해를 돕는 일이라면 확고히 정립되지 않은 뇌과학을 동원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백미는 그가 다양한 태의 실험 결과를 거리낌 없이 활용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특유의 적절한 비유와 산문투의 친근한 문체로 쐐기를 박았다. 독자들은 저자 만의 비유와 문체를 통해 지겨울 겨를 없이 시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시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여행하고 관련 전문가들을 방문하면서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어쩌면 당신도 괴롭혔을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이다. 왜 어린 시절에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일까? 자동차 충돌사고를 당하게 되면 정말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걸까? 할 일이 산적해 있을 때는 생산성이 매우 높은데, 세상의 시간을 다 가진 것 같을 때는 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들까? 우리 몸 안에도 컴퓨터에 내장된 시계처럼 초와 시간, 날을 재는 시계가 있는가? 만약 그런 시계가 있다면 왜 그 시계는 우리가 흔적도 느낄 수 없을 만큼 고분고분하게 있는가? 나는 시간을 빠르게, 느리게, 혹은 멈추게 하거나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는가? 시간은 왜, 어떻게 날아가듯이 빨리 흐르는가?
..... 《시간은 왜 흘러가는가》 중에서



위와 같은 평가에 불구하고 구입에는 이르지 못했다. 보존 상태가 지나치게 나빴다. 상대적으로 나은 질의 책이 책방에 입고되기를 바라면서 책방을 나온 기억이 새롭다. 그런 책을 대형 서점에서 새책으로 마주했으니 감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단연코 손쉽게 넘길 수 없는 유혹이 기다리는 줄도 모른 채.



지인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이 거의 수 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더 늦을 걸 각오하고 지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정이 있어 10여 분 정도 늦을 거라고 했다. 양해를 구하기 직전에 과학 분야 서가에 또 어떤 책이 있나 둘러본 게 화근이었다. 거기 '책' 있었다.



5억 5000만 년 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억은커녕 상상조차 하기 힘든 저 까마득한 시간에 관심을 갖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다. 계기가 있거나 어떤 충동이 있지 않고서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 경우 계기는 다음에 소개할 책 등속과 우연히 조우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촉발되는 일종의 촉매제 같은 것이다. 충동이란 좀 멀리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때늦은 자각이 불현듯 일 때 동반되는 감정상태라고 보면 옳다. 그런 자각은 세파에 어지간히 시달리던 중에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은 강한 동기가 줄곧 뒷받침하는데 내 경우엔 우주 과학 서적을 읽는 것으로 방편을 대신한다. 그 방면의 책이 수 천 권을 헤아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세파에 휘둘린 모양이려니 생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과학 서적, 특히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관한 글을 읽으면 생각이 심장 위로 널을 뛰다 못해 아예 빵빵하게 부풀곤 한다. 우주 과학 서적이 아니라도 좋다. 광막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현재로선 도무지 엄두가 안 날 상대의 어제와 간난신고의 쟁투를 그려보는 건 백번 곱씹어도 가슴 떨리는 일이다.





《아더랜드》는 진화생물학자인 토머스 할리데이 박사의 데뷔작이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시간 저편의 기록을 그 역시 특유의 문체와 표현으로 조형해 냈다. 할리데이는 자칫 두리뭉실해지기 쉬운 과거사를 과학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으며, 역대 최고의 서사로 각 지질시대를 짜릿하게 직조하는 등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학계와 독자는 그의 작품에 열광했다. 그를 천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할리데이의 기록이 얼마나 생생했던지 각 지질시대를 마치 타임머신으로 둘러본 것 같다는 평이 많았다. 거대하고 복잡다단한 지질시대를 핀셋으로 집어야 할 만큼 촘촘하게 도상에 그려낸 배경에 어떤 것이 있을까? 학술적으로 엄정한 사실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그 다운 솜씨가 발휘된 결과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대륙이 갈라지고 천둥 치는 계절이 반복되는 이 역동적인 세계에서 최초의 인간이 출현한다. 여기에서 투르카나 소년이라고 불리는 호모 에르가스테르 소년과 호모 루돌펜시스(이들은 호모 에렉투스의 단순한 변이일 수 있다) 등 호모(사람속) 종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와 있는 플라이오세에는 케리오강이 로뉴문 호수로 흘러들어 가는 카나포이 지역 아카시아 카루(한국에서 흔히 아카시아라고 불리는 아까시아 나무와 다른 식물이다-옮긴이) 사이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가 살았다. 그 이름은 ‘호숫가의 남방 유인원’이라는 뜻이며, 가장 오래된 호미닌(사람족)으로 추정된다.
..... 《아더랜드》 중에서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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