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 달 살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한 살 터울의 사촌 누이가 남편과 함께 제주도에 터를 잡았었다. 당시 부부에게 제주도는 아주 낯선 곳이었다. 거기서 살아본 적도 변변하게 여행 한번 한 적 역시 없던 곳, 처녀지와도 같은 제주도에 누이네가 터를 잡을 생각을 한 것부터 외외였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간 뒤 누이네는 우선 한 달 정도 살아보고 눌러앉을지 말지 결정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섬이라 텃세가 심하지만 안면을 트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더라는 말, 제주도에 살다 온 사람의 말만 믿고 누이네는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다.
누이는 붙임성이 좋았다. 말 트는 건 내 특기,라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 누이는 한 달 만에 제주 사람 다 되어서 돌아왔다. 한 이틀 장위동에 있는 부모님 댁에 머물다가 제주도로 떠났다. 부러 서울로 올라온 건 잘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부부는 제주도에 꽃가게를 열었고 제법 잘 되었다. 거기서 3년을 보내고 누이네는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서 꽃가게를 크게 해 보는 게 부부의 마지막 꿈이라고 했다.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에. 우습긴 했지만 웃지 않았다. 누이가 워낙 비장하게 말해서.
제주도에 관해 정보가 거의 없던 누이네는 제주도 이주 계획을 세운 초기에 제주도에 한 달 정도 세를 얻어 인심과 물가 등을 알아보려고 했었다. 그때 가서 눌러앉을 작정을 해도 늦지 않다는 게 누이네의 계산이었다. 임장 삼아 제주도로 내려간 첫날, 집주인에게 제주도엔 월세는 없고 반년세만 있다는 말을 듣고 누이는 뜨악해지고 말았다. 그곳 사정이 그렇다니 부부는 별도리 없이 반년세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6개월 살이’를 거쳐 3년 정도 제주도에 머물다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반년세에 얽힌 상처
'6개월 살이'가 보편화된 제주도에 '한 달 살이' 붐이 인 건 그 후로도 여러 해가 흐른 뒤였다. 그즈음 전국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치솟았다. 제주도도 광풍을 비켜 가지 못했다. 제주도로 관광 온 중국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제주도의 땅과 건물 매집 붐이 일었다. 내국인들의 제주도 관광도 급격히 늘면서 반년세를 고집하던 시장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제주도 풍광과 지세에 홀린 관광객들은 사나흘 혹은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제주 일주 계획을 세웠다. 특히 둘레길이 나면서 그런 경향이 짙어졌다. 관광객들은 호텔이나 여인숙에 묵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점차 제주도식 임차 조건에 이의를 제기하는 숫자가 늘자 일부 임대인들이 가세해 월세를 계약 조건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요즘엔 워낙 많은 원룸과 오피스텔이 들어서면서 월세가 보편화한 듯하지만 당시로선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러 해 동안 제주도의 문화가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도민들이 없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촉발된 '한 달 살이'는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도 붐을 일으켰고, 여행을 제법 다니는 축에 속한 내국인들에게 훈장 또는 필수품처럼 따라붙었다. 누이네가 반년세로 임차 계약을 맺고 한 달여가 되어 갈 즈음 집주인과 언쟁이 붙었다.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었지만 누이는 무척 힘들어했다. 만약 당시 월세였다면 마음고생하지 않고 집을 옮기면 됐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미국으로 간 뒤 누이와는 연락이 끊겼다. 어떻게 사는지, 자리는 잡았는지 묻지 못했다. 그때 일이 떠올린 지금에선 다른 하늘 아래라도 누이가 잘살고 있겠거니 믿는다. 워낙 재기 발랄한 누이였기에.
누이 생각
유럽 도시를 순회하기에 앞서 시범 삼아 '제주 한 달 살이(내친김에 1년 살이)'부터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아내의 동의를 받았고, 아이들에겐 성수기에 따로 숙박 잡느라 고생할 것 없이 제주도에 오면 집을 비워주겠다는 말도 했었다.
누이가 반년세 임차 계약을 마치고 화훼시장조사를 다니며 한창 꿈에 부풀었을 시기에 집주인과 때아닌 분쟁을 겪고도 나중에야 그때 일을 덤덤하게 얘기하는 걸 지켜보며 내내 마음이 안 좋았었다. 그때 일이 꼬챙이에 찔리듯 가슴에 선명하게 맺히는데 이럴 순 없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잘해주지도 못한 누이 생각을 하면 '제주도 한 달 살이'를 내려놓는 게 백번 옳았다.
양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제주도를 오갔다. 꽃을 볼 때마다 누이 생각이 났었다. 속 깊은 누이의 덤덤한 표정에선 삶에 대한 절절한 고민을 적잖이 읽기도 했었다. 누이 곁을 한시도 떠난 적 없다던 남편과 꽃가게와 꽃시장을 수도 없이 오갔을 것이다. 몸뚱이만 가지고 내려간 30대 초반 누이의 물설고 낯선 제주살이가 녹록했을 리 없다. 밥 할 쌀이 없어 더러는 굶기도 했을 터다. 그 흔한 동전 몇 푼이 없어서 혹은 그것마저 아끼려고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걸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누이를 생각하면 1년 후로 잡은 나의 제주 살이가 사치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쓰고 보니 무거워졌다. 누이와는 추억이 적지 않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누이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누이를 보고 대뜸 같은 학년이니까 친구라며 이름을 부르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기겁하며 손위 대우를 하라고 하는데도 누이는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괜찮다고만 했다. 틈만 나면 난 누이 이름을 불렀다. 연숙아. 연숙아. 연숙아. 그때마다 누이는 잔뜩 미소 띤 얼굴로 왜에~,라고 답하곤 했다. 그렇게 사람 좋은 표정을 난 그 뒤로 다른 사람에게서 본 적이 없다.